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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허스토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이준 열사와 이일정 여사
1.1. 이준 열사 소개
1.2. 이일정 여사 소개
1.3. 이준과 이일정의 결혼
2. 안현부인상점(일정상회) 개업
2.1. 상점 개업과 운영
2.2. 상점 수익금의 활용
3. 여성교육 운동
3.1. 여자교육회와 양규의숙
3.2. 진명부인회와 광동학교
4. 이일정의 삶
4.1. 개인적 어려움과 고난
4.2. 활동 영역의 변화
4.3. 마지막 모습과 소회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이준 열사와 이일정 여사
1.1. 이준 열사 소개
이준 열사(1859~1907)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조실부모하여 주만복(당시 북청의 유지)의 도움을 받아 그의 딸과 결혼했다. 하지만 자식 둘을 얻은 후에 주씨 부인의 기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상경하여 검사시보를 비롯한 공직에 머물기도 하였으나 주로 개화파의 인사로서 독립협회나 보안회, 공진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서울 생활 초기에 도움을 받았던 전 형조판서 김병시의 중매로 34세(1893년)에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이일정 여사와 결혼했다. 김병시의 아내와 이일정의 어머니가 결의형제 사이였는데, 김병시가 배필을 찾던 이일정과 이준에게 적극 권하여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들은 동지적 부부관계로 『이준선생전』에 "총명 다기한 이일정 여사는 실로 동지와 같은 감"이 있어, "군국사와 사회운동 등에 있어 의론하며 공동 활동함을 약속했다"고 쓰여 있다. 1904년 12월에 공진회 회장이었던 이준이 항일운동을 하다 구속이 됐을 때 종로 시위대열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황성신문』에 투고하여 공진회 탄압의 부당성을 알렸다.
1.2. 이일정 여사 소개
이일정(李一貞, 1876~1935)은 한말의 정치 운동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감추거나 나쁘게 쓰지 않았으며 결혼 후에도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이일정은 이화학당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며,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많은 부인들과 힘을 합쳤다. 그녀의 '여자교육 복권록'에서 "여성의 혁신에 여성의 교육이 우선"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여성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여성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자 하는 생각이 매우 선도적이었다. 남편 이준이 감옥에 있는 동안 개점한 부인상점은 당시에 그녀가 활동했던 다양한 모임의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자교육회의 회원들이 귀족 부인이었던 특성상 학교 운영과 의연금 모금에 어려움이 있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새로운 학교에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는 남편 이준의 격려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3. 이준과 이일정의 결혼
이준과 이일정의 결혼은 당시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로 국세가 크게 불안정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준 열사(1859~1907)는 함경남도 북청 출...
참고 자료
사단법인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항일전선에 선 개화기 선걱자/이일정여사」(『사단법인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이양재, 2007.01.15.)
「항일전선에 선 개화기 선각자」(『한겨레신문사』, 박은봉, 1997.08.28)
『작은책』(2005년 7월호)
「[한국여성인물사전] 161. 이일정」(『이투데이』, 홍양희, 2017.07.25)
「열사의 큰 그림자에 가려진 그 부인의 선각성」(『서울&』, 2019.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