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바울의 생애와 신학
1.1. 바울의 젊은 시절
바울의 젊은 시절은 그가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혈통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다고 언급하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누가는 바울을 길리기아의 헬라도시인 다소에서 태어난 바리새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유대인이며, 동시에 헬라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소는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한 곳이었다. 이 도시는 자유, 면책, 시민권이 주어졌고 문화와 철학, 교육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다소의 배경은 바울의 유대적 배경과 헬라적 배경, 그리고 로마와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가말리엘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저명한 학자였다. 바울이 가말리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율법학자로서 공인된 교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권위는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데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의 젊은 시절은 그가 강한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헬라적 문화와 로마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아 율법학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후일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2. 바울의 회심
바울의 회심은 그의 일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바울은 유대교의 극단적 신봉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바울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 체험을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극적이고도 압도적인 체험이었다.
사도행전 기사에 따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다메섹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비추이더니 바울이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들은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였다(행9:3-4). 바울은 그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임을 알아차리고 "주여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예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행9:5).
이 사건으로 인해 바울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그 분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이전에 박해하던 자들을 이제는 전도하고 세워나가는 일꾼이 된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이 회심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세 차례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는데(행9:3-19, 22:6-16, 26:12-18), 이는 그 사건의 충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성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바울의 회심은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다. 바울은 이 사건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바울의 신학은 이 회심 체험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회심한 후 약 여섯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주후 39년 경에 이루어졌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전파했으나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자 하다가 예루살렘 형제들에 의해 가이사랴로 보내졌고, 다시 다소로 보내졌다. 이후 바나바가 방문하면서 바울의 체류가 끝났는데,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의 파송을 받아 바울을 데려가 함께 복음 전파에 힘썼다.
바울은 주후 49년에 "이방인 회심자들의 지위"를 놓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예루살렘 회의"이다. 유대에서 온 회심자들이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 및 모세 율법 준수를 요구하자, 안디옥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상의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보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구원을 위해 할례와 모세 율법 준수가 필수적이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베드로도 안디옥으로 왔는데, 처음에는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와서 비난하자 베드로는 굴복하여 이방인 회심자들과 자신을 구별하였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의 면전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면책하였는데, 이는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음식문제에 대한 훈령을 정하였다.
이처럼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들은 초대교회 내부의 주요한 신학적·실천적 쟁점들이 제기되고 해결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지위와 역할을 둘러싼 갈등은 바울의 선교에 있어 중요한 도전과제였으며,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일정 부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한 그의 사도적 소명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게 해주었다.
1.4. 바울의 선교 여행들
바울의 선교 여행들은 대략 14년(A.D. 46-58년)에 걸쳐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복음화하여 교회를 세웠으며, 이는 바울의 생애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선교활동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바울의 제1차 선교(A.D. 46-49)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보낸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를 향해 갔으며, 살라미와 바보를 지나 총독 서기오 바울이 회심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히자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기로 선언하였다. 제1차 선교의 주요 쟁점은 이방인 회심자들의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둘째, 예루살렘 회의 방문(A.D. 49)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보낸 것으로, 회의 결과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의 영향으로 이방인 회심자들과 더 이상 식사하지 않자 바울은 베드로를 면책하기도 하였다.
셋째, 바울의 제2차 선교(A.D. 50-52)는 예루살렘 회의 이후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 일행이 1차 전도 여행 지역들을 다시 방문하고 마게도냐 환상을 따라 유럽으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빌립보에서 바울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한 일로 투옥되는 등의 일이 있었다.
넷째, 바울의 제3차 선교(A.D. 54-58)는 주로 소아시아 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며 큰 사역을 감당하였고 고린도 교회의 소식도 들었다. 3차 선교를 마치며 바울은 로마 방문을 계획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다가 체포되어 가이사랴와 로마로 압송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약 14년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을 복음화하여 교회를 세워나갔으며, 특히 이방인 회심자들의 지위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증거의 열정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다""
1.5. 바울의 투옥
바울의 투옥에 대하여 살펴보면,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과 체포에서 시작되었다"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야고보에게 문안하였으나, 아시아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모세 율법을 위반하였다고 고소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끌어내어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천부장에 의해 구출되었고, 보호 구금되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바울을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 보냈다. 벨릭스는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2년 동안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다.
새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자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 덕택으로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파선의 위기를 겪었지만, 복음 증거자로서의 소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격려하며 인도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바울은 AD 61년 봄에 로마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였으며, 거기서 2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 로마 투옥 기간 동안 바울은 에베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립보서를 기록하였다"이다.
1.6. 바울의 마지막 생애
바울의 마지막 생애는 다음과 같다.
목회서신(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은 대개 바울이 가택 연금에서 석방된 후 기록된 것이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체포되어 다시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의 감옥에서 이 편지가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의 생애 마지막에 관한 그 밖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후대 교회의 전승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등은 바울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전승을 전해준다.
클레멘트는 바울이 서부의 극단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로마에서 다시 체포되어 황제 네로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한다. 유세비우스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A.D. 60년대 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순교하였고 그의 사도직 수행은 극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위대한 사도이자 신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2. 바울신학의 배경
2.1. 바리새적, 유대교적 배경
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은 바울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말씀들과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강력한 유대교적 배경을 보여준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풍부하게 인용하는데, 그의 서신에서 거의 90회나 사용하였다. 바울은 구약성경 본문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인용하기도 하였고, 원래의 문맥과 아예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