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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수근의 건축 세계
1.1. 김수근의 초기 건축 - 현대 건축의 시초
김수근은 1931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8세 무렵 서울의 북촌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50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1954년 동경예대 건축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스승인 요시무라 준죠와 선배인 단게 겐죠를 만나며 건축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단게 겐죠의 영향은 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에 반영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그의 작품들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은 단게 겐죠의 도쿄 계획 설계안과 유사한 도시계획적 접근을 보인다. 국회의사당 설계안에서는 종로, 마포, 여의도, 영등포, 인천 등 다양한 지역을 연계하는 도시 인프라 확장을 제안하였는데, 이는 단게 겐죠의 도쿄 계획 설계안에서 보이는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사이타마 등을 연결하는 성장 가능한 축선 구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김수근이 단게 겐죠의 도시계획적 사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 건축계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명확한 지향점을 잃게 되었고, 건축가들 역시 서구적인 건물 모방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은 한국 현대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설계안은 단순한 건물 디자인을 넘어 도시 전체의 체계적인 계획을 제안하였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로 여겨졌다. 이는 김수근이 일본에서의 교육을 통해 선진적인 도시계획 기법을 학습하고, 이를 한국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김수근의 부여박물관(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설계를 둘러싸고 왜색 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부여박물관의 경우 일본 신사 양식과 유사한 정문 및 지붕 형태로 인해 왜색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수근은 한국 건축의 독자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그의 이후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김수근의 초기 건축 작품들은 단게 겐죠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한국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부여박물관 논란을 계기로 그가 한국 건축의 고유성과 정체성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건축 활동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2. 김수근의 중기 건축 - 김수근 건축의 전환점
김수근의 중기 건축 - 김수근 건축의 전환점은 그의 건축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에 김수근은 한국적 건축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새로운 건축 언어를 모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김수근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보다 구체화하고 실천해나갔다. 이 시기 그가 설계한 작품들은 인간 중심의 공간 구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샘터 사옥, 공간사옥, 양덕 성당, 청주 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샘터 사옥의 경우, 외관만 한옥의 형태를 차용하고 있을 뿐 내부 공간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 가옥의 인간적 규모와 스케일을 현대 건축에 적용하고자 했던 시도이다. 공간사옥 역시 마찬가지로, 전통 가옥의 공간 구성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양덕 성당과 청주 박물관 또한 전통 건축의 특성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양덕 성당의 경우 전통적인 한옥의 건축 요소들을 활용하여 따듯하고 내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청주 박물관은 전통 가옥의 스케일과 공간 구성을 현대 건축 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김수근의 중기 건축은 전통 건축의 정신과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한국 건축의 독자성을 고민하며 인간 중심의 건축 철학을 구체화해나갔던 것이다.
1.3. 김수근의 후기 건축 - 김수근 작품의 백미
1980년대에는 김수근이 작고 잘게 잘라져서 연결되는 덩어리들로는 처리하기 쉽지 않은 대형 프로젝트들을 설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