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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1.1. 정약용의 생애
1.1.1. 성장과 수학기
1.1.2. 출사기
1.1.3. 유배기
1.1.4. 쇠퇴기
1.2. 정약용의 사상
1.2.1. 인본적 평등사상(민권의식)
1.2.2. 교육사상
1.2.3. 효·제·자
1.2.4. 자연과학사상
1.2.5. 여전론
2. 정약용의 저술 활동
2.1. 목민심서
2.2. 흠흠신서
2.3. 경세유표
3. 정약용의 업적
3.1. 거중기 발명
3.2. 수원화성 건립
4. 정약용 관련 대중 매체
4.1. 다큐멘터리
4.2. 만화
4.3. TV 방송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1.1. 정약용의 생애
1.1.1. 성장과 수학기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그는 성장기와 수학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행적을 보였다.
정약용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주 0)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는 역법, 산수에 통달하고 오언한시인 "小山蔽大山遠近地不同"를 지었다. 이는 간사한 소인은 항상 권력자의 옆에 들러붙고, 충직한 큰 인물은 굳이 가까우려 하지 않고 제 자리서 묵묵히 정진한다는 뜻으로, 현명한 권력자는 거리를 잘 조절하여 가까이 오려는 소인을 멀리하고, 충직한 큰 인물에게는 가까이 오라 말하며,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잘 조절하라는 큰 뜻이 담겨있다. 9세에는 빼어난 학문적 자질을 이라는 제 시문을 모아 만든 시집으로 자랑하기도 하였다.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는데,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이를 통해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마련되었다.
1.1.2. 출사기
정약용은 22세가 되던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1.1.3. 유배기
정약용의 유배기는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어 40세 때부터 57세까지 약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 시기이다. 1801년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받자 정약용은 그 파문으로 인해 충청도 장기에 처음 유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인해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이 시기에 주자학의 대표적 학자인 주희의 가르침을 극복하고 선진 유학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사유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는 성리학적 기질지성설을 부정하고 인간의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정립하였다. 더불어 왕도정치론과 민본주의적 개혁안을 담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목민심서》는 수령의 임무와 백성을 어루리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 저작으로, 실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흠흠신서》는 형전(刑典)에 대한 내용을 다룬 저술로, 정약용이 유배 기간 중 실제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정약용은 어려운 유배 생활 속에서도 꾸준히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펼침으로써, 사회 개혁을 위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이 같은 노력과 태도는 당시 사회 변혁을 위해 몸바쳤던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1.4. 쇠퇴기
정약용의 쇠퇴기는 순조 18년인 58세에 1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75세에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 정약용은 18년 유배 생활 동안 쌓은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흠흠선서』를 저술하였는데...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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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흠흠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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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그날 저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전한 사랑
http://www.kbs.co.kr/1tv/sisa/theday/
EBS - 정약용의 목민심서("Mind of Governing the People")
https://plus.google.com/+ebsdocumentary
다큐S프라임 -실학을 완성한 공학자, 정약용
http://dmb.ytn.co.kr/mytn/pro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