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민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민란의 이해
1.1. 민란과 변란의 개념 및 특성
1.2. 조선후기 사회변화와 민란 발생 배경
2. 홍경래의 난
2.1. 세도정치와 평안도 지역의 경제적 상황
2.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과 성격
3. 임술민란
3.1. 삼정의 문란과 농민 생활의 악화
3.2. 단성 민란과 진주 민란의 전개
4. 동학농민전쟁
4.1. 동학교조신원운동과 농민혁명의 배경
4.2. 고부봉기와 백산봉기의 전개
4.3. 전주화약과 제2차 농민전쟁
5.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명화적
5.1. 명화적의 정의와 활동 양상
5.2. 명화적의 조직과 활동이 민중운동에 미친 영향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조선시대 민란의 이해
1.1. 민란과 변란의 개념 및 특성
조선시대 민란(民亂)은 경제투쟁의 성격이 강한 '농민항쟁'을 말하며, 변란(變亂)은 정감록 등 민중사상을 이용하며 정치적 성격이 강한 일종의 정치투쟁을 말한다. 민란은 "發通→聚會→呈訴→蜂起→해산"의 틀(순서)로 나타나는데, 발통은 민란의 주모자들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농민들에게 모이라는 연락을 하는 것이고, 취회는 농민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며, 정소는 대표자를 뽑아 고을 수령에게 개선책을 건의하는 것이다. 정소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봉기로 드러나는데 봉기는 농민들이 함께 모여 행진하며 관아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해당 수령의 개선 약속 등을 받아내고 해산함으로써 민란은 마무리된다. 조선후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민란으로는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있다."이다.
1.2. 조선후기 사회변화와 민란 발생 배경
조선후기 사회변화와 민란 발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세기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토지의 상품화가 더욱 진전되면서 토지 집적이 촉진되었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중앙 권세가와 지방 수령 등 관료층, 향촌에서 무단 지배를 자행하고 있던 토호층이었다. 권세가들은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토지를 집적해 나갔고, 지방관을 역임한 수령들도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섰다. 토호들의 토지 집적으로 농촌사회에서는 토지로부터 배제된 몰락 농민층이 광범위하게 창출되었으며, 이들은 유랑민 또는 도적 집단이 되어 사회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 부세 운영 방식이 군현 단위로 총액을 매기는 것으로 재편되자 수령은 부세 운영에 적극 개입하여 수탈을 자행하였다.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상공업 분야에서 새로운 이권이 형성되었지만, 공방, 군문, 아문, 토호, 권세가 수령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들 부문을 침탈하였다. 이에 따라 어민, 상인물주, 부상대고, 시전상인, 공물주인 등의 신흥 상공업세력은 국가에 대해 상공업세를 부담하고 다시 궁방, 토호, 권세가, 수령들에게 침탈 당하는 이중고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19세기 전반에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령에 대한 크고 작은 저항이 빈발하였다. 수령의 불법적인 과중한 부세 징수와 탐학이 주된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수령의 민에 대한 가혹한 토색이나 형장의 남발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전반에는 농민들의 향회 활용이 두드러지는데, 향회는 향촌의 사족들을 중심으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차원에서 부세 문제를 둘러싸고 대·소민의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조직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처럼 농민들의 저항 의식이 높아지면서 1862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이어졌다.
2. 홍경래의 난
2.1. 세도정치와 평안도 지역의 경제적 상황
세도정치와 평안도 지역의 경제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세기의 봉건적 사회관계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토대의 발전으로 인하여 전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봉건제의 위기가 조성되자 중앙정치권력은 광범한 사대부계층의 권력참여가 보장되어 정국이 운영되었던 정체체제(붕당정치)에서 소수의 문벌가문만이 정권참여를 보장받은 세도정권으로 변모되었다.
세도정치기에 지방에 파견된 대부분의 수령들은 수령에 임명되기까지 자신들의 뒤를 보아주었던 상전들에게 상납하기 위하여 향촌사회 운영과정에서 각종 이권을 장악하여 수탈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평안도 지역 중에서도 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청북지역의 수령들의 부정탐학은 평안도 지역의 발달한 상품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민(富民)세력의 기반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부민세력은 경제적 상승을 전제로 하여 신분상승의 욕구를 이루려 하였으나 수령의 수탈행위에 의해 좌절되게 되었다. 이에 서북지방에서 최대의 난이라고 할 수 있는 홍경래의 난이 1811년(순조11년), 12월 18일 저녁, 진사 김창시가 격문을 낭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지역차별과 외척 세도정권의 폐정, 이로 인한 재이와 기근, 구세주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봉건제의 위기가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 정부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4개월 간이나 항쟁을 지속함으로써 봉건권력의 도덕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였으며, 이는 기후 반봉건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하층농민들에게 봉건국왕권력을 부정할 수 있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2.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과 성격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과 성격은 다음과 같다.
19세기의 봉건적 사회관계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토대의 발전으로 인하여 전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봉건제의 위기가 조성되자 중앙정치권...
참고 자료
한명기, 「19세기 전반 반봉건 항쟁의 성격과 그 유형」, 『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2012.
배항섭, 「壬戌民亂의 민중상에 대한 검토-근대지향성에 대한 반성과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 『역사와 담론집』 66, 역사비평사, 2012.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 연구의 몇가지 문제-壬戌民亂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19, 역사비평사, 2007.
배항섭, 「조선후기 삼정문란과 明火賊」,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1.
임혜련, 「철종대 정국과 권력 집중 양상-壬戌民亂 배경과 관련하여」, 『한국사학보』 49, 2012
고성훈 외, 『민란의 시대-조선시대의 민란과 변란들』, 가람기획,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