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양사 10대 사건
1.1. 십자군 운동
십자군 운동(crusades)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다. 참가자들은 가슴이나 어깨에 십자 표지를 달았고 돌아올 때는 등에 달았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투르크 족의 순례자에 대한 박해와 동방세계의 부유함을 강조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성전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참가자들은 '하느님이 원하신다'고 외치며 이에 호응하여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1세기의 유럽 사회는 민족 이동의 혼란이 가라앉고 인구와 농업 생산이 증가하였으며, 새로운 도시가 발달하고 상인들은 밖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는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크리스트교 순례자를 박해하였고, 상인들의 동방 진출을 막았으며 서쪽까지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까지 침공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되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교황 우르반 2세의 호소에 따라 11세기 말부터 200년간 7회에 걸쳐 십자군 원정이 단행되었으나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유럽에서 교황권이 쇠퇴하고, 국왕 권력이 강화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전사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전쟁에 참여했던 기사와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어 봉건제도가 흔들렸다.
한편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해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문화적 접촉을 이루어졌고,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는 등 유럽인의 시야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결국 몰락하여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에 대한 정열이 높아졌다.
십자군 운동은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 등의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비록 십자군 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권력의 교체(교황권추락, 왕권강화)가 일어났으며 동ㆍ서양의 문화가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1.2.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1215년 영국 왕 존이 귀족들의 강압에 따라 승인한 칙허장이다. 대헌장으로 번역되는 이 문서는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가 되었다.
본래 마그나 카르타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이나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 크게 이용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봉건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영국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마그나 카르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1.3. 흑사병
중세 유럽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흑사병은 13세기 말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며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이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이는 중세 풍토병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유럽은 인구 증가와 농업 발달로 어느 정도 안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이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전염병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 손실과 함께 농업 생산력 저하, 경제 침체, 사회 질서 붕괴 등이 발생했다. 특히 농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농지를 버려두게 되고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농민들의 지위 향상을 가져왔고, 이는 봉건제의 약화로 이어졌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친 질서 붕괴는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변화 요구를 촉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흑사병은 중세 사회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그 충격으로 인해 중세 사회가 붕괴되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 지리상의 발견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여 바다에서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자전하면서 공전을 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지동설을 증명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규모의 항해 및 발견으로 당시 유럽은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다.
지리상의 발견은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항로 개척을 시작으로 하여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거쳐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 각국민의 탐험 및 항해시대를 일컫는다. 먼저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가 1497년에 탐험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횡단한 끝에 이듬해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1492년에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70여 일 만에 산살바도르 섬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그가 발견한 섬이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기에 지금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하여 이곳이 신대륙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 부르게 되었다. 이어 1519년 포르투갈 사람 마젤란은 에스파냐왕의 도움을 받아 대서양으로 출발하여 남미의 최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지나 1521년에 필리핀에 도착하였고, 그가 원주민에게 살해된 뒤 그의 부하들이 인도양과 희망봉을 지나 1522년에 에스파냐로 돌아감으로써 세계일주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 항해와 발견으로 당시 유럽인의 한편,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비서구지역에 대한 정치지배, 교역통상 등의 체계가 이루어져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던 지구가 평평하고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관념이 깨지면서 유럽인들의 시야가 크게 확대되었고, 새로운 세계관과 생활양식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리상의 발견은 당시 유럽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5. 르네상스
15~16세기에 걸쳐 일어난 르네상스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여기는 새로운 사상이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