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바다의 실크로드
1.1. 중국, 해상 실크로드의 진원지
1.1.1. 고대 중국의 해상교역
중국의 바닷길 이용은 진(秦)대부터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사기(史記)』에서 진시황이 중국 통일 후 번우(番禹, 지금의 광주)를 통해 남해 무역을 한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는 더욱 더 명확하게 무역도시 번우에서의 교역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진대에 이미 그곳을 통한 해상교역과 더불어 해로가 이용되었음을 시사해준다. 그와 더불어 한(漢)과 인도간의 항해로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후한(後漢)은 서역과의 교류에 관심을 나타냈고 『후한서』에는, 환제(桓帝) 연희(延熹) 9년(166) 대진 황제 안돈(마르쿠르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로 추정)의 사절이 상아·물소뿔·바다거북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1.2. 삼국시대~수·당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
삼국시대~수·당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은 당시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국시대의 오(吳)는 본토 교역로 차단에 직면하자 해상교역에 주력하였으며, 5천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보유하며 동남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은 불교의 해상 전파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교역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수(隋) 왕조에서는 수양제 시기 남해 물품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후 당(唐) 왕조 시기에는 해상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당 정부는 광주와 교주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외국 상인들의 교역과 선박 운영을 관리하였다. 당시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당의 무역항인 광주에서 매년 4천여 척의 각국 상선이 드나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송(宋) 왕조에서는 상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 화폐 사용과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송 정부는 광주와 명주에 시박사를 설치하여 해상무역을 관리·장려하였다. 광주는 아랍 및 동남아 상인들의 주된 활동 기지로, 이들의 거주구역인 번방이 조성될 정도로 국제 교역이 활발하였다. 명주에서는 고려, 일본 등 동북아시아 선박들이 교역을 하였다. 이후 남송 시기에는 북송 때보다 해외무역이 더욱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송전이 아랍과 동남아 지역으로 대량 유출되는 폐단도 있었다.
원(元) 왕조에서는 남송이 지배하던 항구들을 통제하면서 해외무역을 더욱 활성화하였다. 특히 포수경과 같은 색목인들을 적극 활용하여 해상 경영을 강화하였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아시아 각국에 무역을 권유하는 칙서를 내리는 등 팽창적인 해상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 중국은 도자기, 향료 등의 수출품목이 크게 늘어나는 등 해상무역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원 시기까지 중국의 해상무역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고, 국가 경제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상을 통한 동서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 문화의 해외 전파와 외래 문물의 유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중국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1.1.3. 송·원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
송·원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은 대외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중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전환기였다. 송나라는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해로를 통한 교역이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은 아라비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향료, 진귀한 보물 등을 수입하였다.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이 대운하의 수로 결절점이었다는 점에서 송나라의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
특히 광주와 명주에 시박사를 설치하여 왕조의 해상무역 정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광주는 아라비아와 동남아 상인들의 주요 활동기지였고, 번방을 통해 자체적인 행정과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남송 시기에도 화폐 유출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송전이 국제 화폐로써의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원나라는 남송이 지배하던 해항들을 관할하면서 해외무역을 더욱 활성화하였다. 유목민족이었던 원나라는 색목인을 활용하여 상업 발전을 도모하였고, 쿠빌라이 칸은 아시아 각국에 무역을 권유하는 칙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도자기였으며, 특히 원대 천주의 아랍 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송·원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상업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 운하 건설 등으로 전국적인 상업망이 형성되어 아라비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밀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국 정부 또한 시박사 설치 등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해상무역을 적극 장려하였다. 특히 원나라는 상업 발전을 위해 색목인을 적극 활용하여 해외무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1.1.4. 명·청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
명·청 시기 중국의 해상교역은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명 태조 홍무제는 조공무역과 해금정책을 내세워 대외무역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후 상황에 따른 변화와 타협으로 해상교역이 지속되어 갔다. 청 왕조는 포르투갈 등 서구 열강의 진출을 차단하고자 해금정책을 펴면서도 공행무역을 통해 일정 수준의 교역을 유지하였다.
명 태조 홍무제는 국내 체제 구축에 주력하면서도 해외로의 팽창을 시도했다. 즉위 직후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종용하고 조공무역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엄격한 해금정책을 내세워 해외로의 출항을 금지하면서 사무역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를 통해 해외무역을 조공무역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제재 속에서도 밀무역은 끊이지 않았고, 조공무역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해상교역이 지속되었다.
명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변화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내항하면서 중국과의 교역에 관심을 기울이자, 명 왕조도 해외 무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락제 시기 정화의 대규모 해외 원정은 명 왕조가 해상 진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정화는 여러 차례 항해를 거치면서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진출했고, 이를 통해 각국과의 교역 활성화와 조공체제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이후 명 왕조는 다시 폐쇄적인 정책으로 회귀했다. 후대 황제들은 정화의 항해 정책을 비판하고 해금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