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고와 장고의 역사에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최초 생성일 2024.10.11
5,000원
AI자료를 구입 시 아래 자료도 다운로드 가능 합니다.
새로운 AI자료
생성
다운로드

상세정보

소개글

"요고와 장고의 역사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요고와 장고의 역사
1.1. 요고의 의미와 유래
1.2.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의 요고
1.3. 장고의 의미와 발전
1.4. 고려와 조선시대의 장고

2. 나례, 성황제, 두레, 재인청
2.1. 나례의 의미와 형식
2.2. 성황제의 의미와 발전
2.3. 두레의 의미와 특성
2.4. 재인청의 의미와 역할

3. 풍물이란
3.1. 풍물굿의 개념
3.2. 풍물굿의 기원
3.3. 풍물을 바로보는 시각

4. 판굿이란
4.1. 판굿의 의미와 구조
4.2. 지역에 따른 판굿의 특징
4.3. 풍물의 가락과 장단

5. 악기의 구조와 관리
5.1. 징의 구조와 역할
5.2. 북의 구조와 연주법
5.3. 장구의 구조와 수리방법
5.4. 꽹과리의 구조와 종류

6. 무용부분
6.1. 화관무
6.2. 검무
6.3. 부채춤

7. 민요부분
7.1. 경기민요
7.2. 남도민요

8. 합주형태의 음악극
8.1. 사물놀이
8.1.1. 사물놀이의 유래
8.1.2. 사물놀이의 정의
8.1.3. 사물의 명칭과 유래
8.2. 태평소(호적 시나위)
8.3. 시나위
8.4. 농악

9. 소리극
9.1. 뺑파전(창극)의 특징

10.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요고와 장고의 역사
1.1. 요고의 의미와 유래

요고(腰鼓)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타악기로서, 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요고는 몸통 양편에 북면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연주자는 이 몸통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고의 사용은 늦어도 5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삼국시대에는 요고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악기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의 요고

고구려의 요고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타악기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신라의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기 등 여러 유물에서 요고를 묘사한 그림이나 부조를 찾을 수 있다. 요고는 세요고(細腰鼓)라고도 불리는데, 크기가 매우 작아 어깨 넓이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몸통 양편에 북면이 달려 있었으며, 연주자는 이 몸통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대의 기록에서 "요고"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있는데, 수나라 및 당나라의 기록에서 고구려 요고와 관련한 언급이 있어 고구려의 노래 "고려가"에서 요고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적어도 고구려 시대 중 어느 시점(6세기 전후)에는 요고가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관련한 기록에서 요고라는 명칭이 정확히 사용된 기록은 없으나, 백제 7세기 유물인 화령리 부조에서 요고와 비슷한 형태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요고형 악기가 백제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요고는 통일신라 시대까지 수용된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 유물에서도 계속적으로 요고가 확인된다.


1.3. 장고의 의미와 발전

장고의 의미와 발전"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전통 타악기로 사용되어 왔다. 장고는 통 두 개를 연결한 몸통을 갖고 있으며, 이 몸통의 양편에 가죽을 메어 때릴 수 있는 면을 만든다. 오른손은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잡고 오른편의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또는 궁굴채(끝에 동그란 나무공이를 단 채)로 북편을 치는 형태이다.

장고의 원형은 앞서 살펴본 요고로 보며,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이어졌던 요고가 점차 그 크기가 커지면서 장고형으로 변해갔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장고가 등장하게 된다. 문종 30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를 담당하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 음악에서 장고를 편성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총 23곳에서 장고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특히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서도 장고의 유래와 장고의 연주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오른손에 채를 잡고 왼쪽을 손으로 쳐서 연주하는 타악기로, 이미 성종 시대에 장고 열채를 잡고 두드리는 연주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고의 연주법이 "쌍(합장단)", "편(채편)", "고(북편)", "요(굴림채)"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장고와 연주되는 방식과 같은 "덩(쌍, 북편과 채편을 모두 치는 연주법)", "덕(편, 채로 채편을 치는 연주법)", "쿵(고, 손 또는 궁굴채로 북편을 치는 연주법)", "더러러(요, 채편을 가늘게 여러 번 떨면서 치는 연주법)" 등의 장고 연주법이 이미 이 시대에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다.


1.4. 고려와 조선시대의 장고

장고(杖鼓)란 장구라고도 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타악기이자 절주악기에 해당한다. 장고는 통 두 개를 연결한 몸통을 갖고 있으며, 이 몸통의 양편에 가죽을 메어 때릴 수 있는 면을 만든다. 오른손은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잡고 오른편의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또는 궁굴채(끝에 동그란 나무공이를 단 채)로 북편을 치는 형태이다 – 정악에서는 맨손으로 북편을 치고, 농악에서는 궁굴채로 북편을 친다.

고려 시대 장고에 대해서 살펴보면, 장고 또는 장구의 원형은 앞서 살펴보았던 요고로 보며,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이어졌던 요고가 점차 그 크기가 커지면서 장고형으로 변해갔던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요고와 관련한 기록이나 유물에서 요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가 오늘날 장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점 역시 요고를 장고의 원형으로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장고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해당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장고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종 30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를 담당하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 음악에서 장고를 편성하여 사용하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고 청자로 만든 장고와 흑유로 만든 장고 등 여러 장고가 고려 시대 유물로서 현전하고 있다.

조선왕조시대의 장고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은 총 23곳에서 장고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데,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서도 장고의 유래와 장고의 연주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악학궤범』이 묘사하는 장고는 오른손에 채를 잡고 왼쪽을 손으로 쳐서 연주하는 타악기로, 이미 성종 시대에 장고 열채를 잡고 두드리는 연주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고의 연주법이 "쌍(합장단)", "편(채편)", "고(북편)", "요(굴림채)"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장고과 연주되는 방식과 같은 "덩(쌍, 북편과 채편을 모두 치는 연주법(", "덕(편, 채로 채편을 치는 연주법)", "쿵(고, 손 또는 궁굴채로 북편을 치는 연주법)", "더러러(요, 채편을 가늘게 여러 번 떨면서 치는 연주법)" 등의 장고 연주법이 이미 이 시대에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나례, 성황제, 두레, 재인청
2.1. 나례의 의미와 형식

나례(儺禮)란 나희(儺戱), 구나(驅儺), 대나(大儺) 등이라고도 불리며 궁궐에서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의례 중 하나이다. 나례의 목적은 잡귀를 쫓아내기 위한 벽사(辟邪)로, 즉 한 해 동안 궁궐에 묵어 있던 귀신이나 재앙을 쫓아내고 새로운 기운을 맏아들이기 위해 매년 음력 섣달 그믐마다 나례를 지냈다. 민중도 섣달 그믐에 벽사 행위의 일부로 부뚜막이나 지붕을 수선하고 가축 우리와 집안을 정돈하는 등으로 오래 된 흔적을 닦아내는 행위를 했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자정에는 사귀 및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해 폭죽을 터뜨렸다. 궁중에서도 이처럼 벽사 의례로서 나례를 거행하였는데, 아마도 한반도의 궁중 나례는 고려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오면서 정착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나례는 음악과 춤, 폭죽을 모두 동반하는데 특히 붉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쓰며 춤을 추는 등으로 축귀(逐鬼)의 목적이 뚜렷한 행위가 함께 치루어졌다. 벽사 행위를 대표하는 무용 중 하나인 처용무가 나례에서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동물 또는 동물을 대신하는 인형을 희생양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유교를 국본으로 삼는 조선 시대에 궁중 나례가 폐지될 것이 여러 번 논의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중기까지 "대나", 즉 대대적인 나례 행사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 비록 그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나례는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나례는 섣달 그믐만이 아니라 왕실 행차, 관리 부임 등 축하가 필요한 행사에서 행해지기도 하는 등, 점차 벽사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연희 내지 놀이로 변화하게 되었고 나례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민가의 광대, 재인, 희자 , 기녀 등이 담당하게 되는 바 이 시기에는 나례를 "나희"나 "잡희"라고 부르게 된다.


2.2. 성황제의 의미와 발전

성황제는 마을 단위로 거행되던 신앙 행위이자 제의(Ritual)로, 마을 공동체가 함께 모시는 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성황 신앙은 한반도의 삼국시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발달한 신앙 중 하나로,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고려는 송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교류를 통해 성황 신앙이 한반도로 건너왔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이 성주로서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호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지역 거주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황제를 집전하였다. 이를 통해 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함과 동시에 지역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지역 내에서의 권력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왕정제가 확립되었고 유교 교리에 맞는 제의들이 중시되면서 성황제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성황제는 왕이 임명한 관리에 의해 집전되는 국행(國行)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성황제의 절차, 시기,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민간이 직접 행하는 성황제 역시 이와 개별로 진행되어, 지방의 주민들이나 무당이 직접 주도하는 성황제가 특히 조선 후기에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성황제는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지역 권력과 관련되어 변화해 왔다. 원래 성황 신앙은 지역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이었으나, 점차 지역 호족과 왕권 간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이용되었으며, 유교 체제가 확립된 조선 시대에는 국가 권력에 의해 정형화되고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황제의 발전 과정은 한반도 지역 정치·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2.3. 두레의 의미와 특성

두레는 농촌에서 농사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조직한 지역 조직이다. 두레의 어원으로는 "드레", "드리", "드로" 등 납입(Input)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는 설과, 조직 내지 전체를 의미하는 "두르다"라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두레가 정착된 시기는 이앙법이 보편화된 조선 후기로, 이처럼 이앙법에 따라 농사를 지을 경우 다수의 손길이 집약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있는데, 이러한 농번기에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집단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농사의 효율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외에도 여성들은 길쌈을 함께 하기 위한 길쌈 두레를 조직하기도 했고, 남성들은 삼 농사를 함께 짓기 위한 삼 두레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동 노동을 위해 조직된 두레는...


참고 자료

조석연, 한국 요고(腰鼓)의 기원에 관한 연구, 음악과 문화, 2011
서울신문, 진도 앞바다서 되살아난 전설의 악기 ‘요고’, 2014.1.24.
조선일보, "동아시아서 가장 이른 시기의 腰鼓, 세종시서 나왔다", 2017.4.7.

-http://www.woorimadang.or.kr/
-http://www.sori.jeonbuk.kr
-http://www.doodrock.co.kr
-http://www.samulnori.net/

주의사항

저작권 EasyAI로 생성된 자료입니다.
EasyAI 자료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시고, 추가 검증을 권장 드립니다. 결과물 사용에 대한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AI자료의 경우 별도의 저작권이 없으므로 구매하신 회원님에게도 저작권이 없습니다.
다른 해피캠퍼스 판매 자료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용도로만 이용해 주셔야 하며, 수정 후 재판매 하시는 등의 상업적인 용도로는 활용 불가합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