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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 각국의 금융·외환위기 원인과 대응
1.1. 동아시아 각국의 금융·외환위기 원인
1.1.1. 태국
태국의 외환위기는 1990년대 내내 지속된 경기호황과 해외자본의 유입 증가로 인한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태국 정부는 외환 및 자본자유화를 급속히 추진하여 해외자본유입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과 금융기관의 무분별한 외자도입과 부동산개발 등에 비효율적인 투자가 확대되면서 일시적으로 부동산가격이 상승하였다.
그러나 1996년부터 부동산 공급과잉으로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건설업체와 부동산개발업체를 중심으로 기업 도산이 늘어나면서 금융기관의 대출이 부실화되었다. 또한 1990년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던 수출이 1996년부터 엔화 약세와 중국산 저가품과의 경쟁 심화로 급속히 둔화되어 경상수지 적자폭이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제여건 하에서 1997년 3월 태국 정부의 부실금융기관 합병 발표를 계기로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태국 정부는 부실금융회사에 대한 증자 명령과 대손충당금 설치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금융시장의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결국 5월 바트화의 절하를 예상한 헤지펀드의 투기적 공격으로 태국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과 금리인상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바트화 가치 방어에 실패하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태국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은 급속한 외환 및 자본자유화로 인한 부작용, 거품 경제 붕괴에 따른 금융기관 부실, 경상수지 적자 확대, 그리고 경직적인 환율정책 운영 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정부의 시장개입 실패와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에 취약했던 것도 주요 요인이었다.
1.1.2.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980년대 후반 금리자유화와 민간은행설립 자유화에 따른 금리경쟁, 대출경쟁 심화로 부실채권이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말 외국인직접투자가 급증하고 금융당국의 규제가 미비한 상황에서 외화차입이 증가하면서 부동산 시장을 중심으로 경기과열이 전전되었다.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더욱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전 인도네시아는 성장률, 경상수지 등 기초 거시경제여건이 태국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하지만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동남아시아 경제에 대한 외국투자가들의 불신이 팽배하여 인도네시아의 금융·외환시장도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외환위기에서 경제마비 상태로 발전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율안정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경제안정화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구조개혁을 추진하기로 IMF와 합의하였다. 1997년 10월 인도네시아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43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IMF 협약을 무시한 채 성장률, 환율 등 경제전망지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가정하여 재정수지 균형을 유지하는 1998년도 예산안을 발표하여 IMF와 미국 등의 반발을 샀다. 이에 따라 IMF는 1998년 2월 자금지원 중단을 경고한 후 3월 6일에는 3월 15일까지 예정된 30억달러 지원을 4월 이후로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일관성, 투명성 및 현실성이 결여된 정책추진으로 대외신뢰가 크게 저하되었고 국내정세의 불안 등으로 외국투자가의 신뢰도가 하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피아화의 대미달러 환율은 사상 최저시세로 폭락하였고 1998년 5월 들어 소요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인도네시아 경제가 마비상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후 IMF와의 재협상을 통해 은행구조조정, 재정정책, 통화정책 및 구조개혁 등에 관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였다. 그 결과 7개 부실은행에 대해 영업정지를 시키고 나머지 7개 부실은행은 인도네시아 은행재건청이 관리하도록 결정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국내 상업은행의 외채에 대한 상환계획을 발표하고 물가 및 루피아화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5월 4일 IMF와의 합의에 따른 유류가격의 대폭 인상조치를 계기로 소요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인도네시아 경제가 다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8년 6월 IMF와 재협상을 통해 경제지표 전망치를 대폭 하향 조정하는 등 정책을 재수정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전개되었다.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경제가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IMF와의 협약 이행 부진 등으로 대외신뢰가 크게 저하되었다. 특히 정치권력과 결탁한 부정부패가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 이후 급속한 경제 회복에 실패했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1998년 6월 이후에야 IMF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었다.
1.1.3. 필리핀
필리핀은 1997년 7월 페소화 절하 이후 동남아에 전파되고 있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와 신용한도 합의에 따라 IMF 요구사항을 추진하고 있다. IMF 요구사항 충족을 위해 1997년 12월 8일 필리핀 의회는 신조세개혁법을 승인하였는데, 6인 가족 기준 소득세 면세 기준을 76% 상향 조정하였고 거주자 외화예금에 대한 7.5%의 세금 부과 및 음성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을 통해 약 60억 페소(11억 7천만 달러)의 조세수입 증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1998년 4월 1일 필리핀 정부는 아시아 외환위기 악화에 대비하기 위해 IMF와 13.7억 달러 규모의 예비적 스탠바이 협약(precautionary stand-by arrangement)을 체결하고 향후 2년간 필요할 경우 동 자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필리핀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환율 변동폭을 확대하고 공적 차입을 축소하는 대신 민간 자본 유입을 추진하였다. 또한 총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재정 긴축과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필리핀은 경제 안정화 정책과 구조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대외 신뢰가 미약하나마 다소 회복되면서 필리핀 환율은 1998년 1월 초 사상 최저 시세를 기록한 후 소폭 절상되었다가 점차 절상되어 대체로 1998년 3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6월 들어 환율은 엔화의 약세로 인해 다시 다소 절하되었다. 즉 외환위기에 대처하여 강력한 경제 안정화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페소화의 대미달러 환율은 1997년 6월말의 26.4페소에서 1998년 1월 6일 45.2페소로 41.6% 절하하였다. 그 후 다소 절상되어 2월말 이후 5월말까지 38~40페소 수준을 유지해 오다 엔화 약세 등의 영향으로 6월말에는 다시 41.5페소로 소폭 절하하였으나 그 후 필리핀의 통화 가치는 미달러화 대비 15-20% 절하 상태인 38-42페소 수준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3개월물 단기 금리는 1997년 6월말의 11.6%에서 12월말 31.4%로 급상승하였으나 그 후 빠른 속도로 하락하여 1998년 4월말 이후 15%대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으며 1999년에도 12-14% 수준에서 머물렀다. 주가는 1997년 6월말의 2,809에서 12월말 1,869로 크게 하락한 후 1998년 들어 다소 상승하였으나 2월말 이후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6월말에 1997년 12월말 수준보다 낮은 1,760으로 크게 하락하였다. 이를 저점으로 점차 안정을 되찾았으나 1999년 중반 이래 다시 하락세를 나타내었다. 이는 내부자 거래 및 주가 조작 등으로 시장에 대한 신뢰 상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실질GDP 성장률은 1997년 5.8%에서 1998년 -0.5%로 하락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외환위기 국가들 중 상대적으로 적게 하락한 것으로 1999년 초 하락세를 멈추고 경제 회복이 점차 가시화되어 동아시아 위기 국 중 비교적 낮은 3.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2000년에도 생산은 완만한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경제활동의 위축 정도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97년 5.1%에서 1998년 9.0%로 계속 상승하였으나 1999년 다소 진정되어 6.7%에 이르렀다.
필리핀의 상품수지는 1997년 112억 달러 적자에서 1998년 적자폭이 크게 축소되어 500만 달러 적자에서 1999년 43억 달러 흑자로 전환하였다. 수출은 1997년 252억 달러였고 수입은 364억 달러였으며 1998년 수출 295억 달러, 수입 295억 500만 달러, 1999년 수출은 350억 달러로 크게 확대되었고 수입은 307억 달러로 흑자를 기록하였다. 경상수지는 1998년 13억 달러 흑자에서 1999년 51억 달러 흑자로 기록되었고 이에 따라 외환 유동성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환율 안정을 위한 외환시장 개입 과정에서 과다하게 늘어난 통화량을 불태화시킴으로써 총수요 압력을 회피할 수 있는 통화 정책으로 통화량(M3)을 중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준수하되 인플레이션 목표치도 동시에 발표하는 수정된 형태의 통화량 목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필리핀의 경우 통화량 목표제의 부정적 측면이 크게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자본자유화와 더불어 통화량과 물가와의 관계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이 제도의 유효성이 크게 저하되었다. 따라서 필리핀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을 중앙은행의 주요한 목표로 명시하면서 기존의 통화량 목표제에 기초한 통화 정책 운용 방식을 다소 수정하여 1994년부터 물가 목표를 동시에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의 경우 금융 부문이 다소 위기 조짐이 있었지만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은행들 책임 하에 자산을 관리하는 조치를 하였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저축 은행(thrift banks)의 부실화 등으로 무수익 여신 비율이 늘어났다. 필리핀의 기업 구조 조정은 증권거래위원회가 이 업무를 맡고 있으며 필리핀 정부의 지원으로 자율적인 해결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은 외국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나 통제를 하지 않았으며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환율 제도는 환율 변동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구조 조정 방식은 정부 주도보다 시장 지향적인 접근법을 선호하고 있다.
1.1.4.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태국의 바트화 폭락 이후 동남아 경제에 대한 외국 투자가들의 불신이 팽배하여 대외신뢰가 크게 하락하고 외국자본의 유출이 가속됨에 따라 링기트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이 높아졌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1997년 7월 9일 이후 링기트화의 절하 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규모의 외환시장 개입과 고금리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대외신뢰가 크게 하락하고 외국자본의 유출이 가속됨에 따라 링기트화는 계속 절하되었다. 링기트화의 대미달러 환율은 1997년 6월 말의 2.52링기트에서 1998년 1월 8일에는 4.68링기트로 46.2%나 절하되었다.
이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외환위기에 대처하여 자력으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우선 1998년 3월 31일 금융구조조정을 위한 세부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자산관리회사를 설립하여 무수익여신을 인수하고 매각하였으며, 모기업인 은행과 금융회사 간 합병을 추진하였다. 또한 금융회사의 자기자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