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일조형 예술 연구
1.1. 세종문화회관 답사
1.1.1. 설계개요
세종문화회관의 설계개요는 다음과 같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12월 2일 소실된 시민회관 자리에 대규모 시민문화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1973년 4월 30일 마감된 설계경기에 의하여 엄덕문, 전동훈, 송명규가 합작한 안이 우수작으로 채택되어 건립된 문화예술의 전당이다.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가 서울의 상징적 도시 축인 세종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건물의 기념성이 매우 중요했는데, 당선작은 이러한 측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건물의 배치는 대극장과 소극장을 구분하고 그 가운데 진입부를 두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한국 고유 건축양식의 하나인 ㄷ차형의 평면 형태를 기본으로 한 기단, 기둥, 지붕의 3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낮으막하고 장대한 기단부에는 대소 연회장, 전시장 등을 배치하였고, 기단 위 북쪽에는 대강당, 남쪽에는 소강당, 중간부분에는 회의장 등을 배치하였다. ㄷ자형 배치에 의하여 형성된 마당은 세종로에 인접한 중요 외부 공간이 되어 건물의 앞뒷면을 관통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세종문화회관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을 현대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1.2. 건축물의 특징
세종문화회관의 건축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건물 외관은 한국적인 것을 현대적인 감각에 접합시켜려 노력한 흔적이 뚜렷한 건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건물 외형이 주는 육중한 지붕의 이미지와 그것을 떠받치는 계단실과 열주, 그 사이의 완자무늬와 빗살무늬가 엮어 내는 상세 처리와 이질감을 주지 않는 조형미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다시 한번 갖게 하였다. 외관에 대한 논쟁과 관계없이 세종문화회관은 일반 시민들이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건물 후면에 소공원을 두어 옥외공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통해 세종문화회관은 1980년대 이후 지방도시에 세워지게 될 많은 문화회관의 전범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1.3. 다목적 문화시설
세종문화회관은 음악, 무용, 연극 등 무대예술공연 뿐만 아니라 미술전시 및 각종 홍보활동과 국제회의장으로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된 국제적 규모의 다목적 문화시설이다. 다목적 홀의 성격을 가진 4,224석의 대강당을 비롯하여 530석의 소강당, 270석의 대회의장,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시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무대는 500평에 500명이 동시에 출연할 수 있는 지름 17m의 회전무대, 4개의 수평 이동무대, 3개의 승강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파이프 오르간은 98소톱과 6단건반, 8.098본의 파이프, 264개의 스페인 드럼, 그리고 32개의 한국범종으로 구성된 초대형이다.
1.2. 정체성의 모색과 지역성의 탐구
한국현대건축에서 나타나는 지역주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특징짓는 중심적인경향이었다. 36년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시기와 3년에 걸친 한국전을 거친 후, 한국의 건축가들은 새로이 태어난 국가와 새로운 문명에 알맞은 '건축적 이념형'을 찾아나섰고, 자역성의 탐구는 바로 이런생각을 뒷받침하던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근대건축의 도구적 적용(Instrumental adaption)을 통해 파괴되어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시지각적 체계와 공간의식을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건축가마다 달랐는데, 이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의 전통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다보며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이고, 둘째는 과거의 건축형태에서 나타나는 주요모티브를 별다른 비판 없이 취하려는 수용적 태도이다. 마지막은 토착적인 지역주의로, 주로 벽돌과 경사지붕을 이용하여 건축의 유기적이고 자연주의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역주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띠었다. 1960-70년대는 비판적 지역주의와 수용적 지역주의가 공존했다. 한편으로는 김중업, 김수근, 이희태, 엄덕문 등과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 전통건축이 비판적으로 재해석되었고, 그것이 가지는 공간, 조형의식, 장소성, 시지각적인 질서 등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모티브를 그대로 차용한 건축물들이 주로 정부가 발주한 문화시설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지역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약간 변화했다. 토착적인 재료나 유기적인 형태가 건축가들에 의해 보다 자유롭게 논의되었고, 주로 종교건축을 중심으로 토착적인 지역주의 건물들이 많이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2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지역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한국의 현대건축가들은 전통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있는 인식을 획득했고, 건축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도출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에는 지역성의 문제가 그다지 민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20년간의 논쟁을 통해 ' 그 시대 가장 뛰어난 건축이 새롭게 전통을 창조한다'는 생각이 건축가들 사이에 하나의 합의점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건축가들의 관심은 추상적인 논쟁보다는 건물자체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3. 디테일의 디자인과 전통성의 표현
세종문화회관의 디테일에서 드러나는 전통성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건물 외관은 한국적인 것을 현대적인 감각에 접합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건물 외형이 주는 육중한 지붕의 이미지와 그것을 떠받치는 계단실과 열주, 그 사이의 완자무늬와 빗살무늬가 엮어 내는 상세 처리와 이질감을 주지 않는 조형미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다시 한번 갖게 한다. 전면의 조각은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으로 중앙 홀의 출입구 양 측면에 위치하며, 비천해 내려오는 선을 이루며 건물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열주를 비롯하여 주두와 처마에 이르기까지 주요부재가 석재이고 그 규모가 일반 목조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마치 그리이스의 석조오더를 연상시키며 단순화된 전통적 요소들은 형태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건물 외형이 주는 육중한 지붕의 이미지와 그것을 떠받치는 계단실과 열주, 그 사이의 완자무늬와 빗살무늬가 엮어 내는 상세 처리와 이질감을 주지 않는 조형미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다시 한번 갖게 한다.
1.4. 결론
결론에서는 세종문화회관의 건축적 특성과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한국 현대건축에서 나타나는 지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설계자 엄덕문은 전통 건축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했는데, 특히 육중한 지붕의 이미지와 그것을 받치는 열주, 그리고 벽면을 장식하는 전통적 문양 등을 통해 전통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려 하였다. 또한 건물 후면에 소공원을 조성하여 일반 시민들도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처럼 세종문화회관은 기념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권위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후 지방 도시에 세워지게 될 많은 문화회관의 전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세종문화회관은 전통성과 기능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설계자 엄덕문은 버려진 우리의 전통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 건축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통 건축의 요소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활용함으로써, 전통과 기능의 조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 고유의 건축 문화를 창달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세종문화회관은 한국 현대건축에서 지역주의와 전통의 현대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권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후 지방의 문화회관 건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전통성과 기능의 조화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정동을 통해 본 근대의 모습
2.1. 답사지역 선택 동기 및 답사 경로
정동은 서울 덕수궁 뒤편에서 경향신문사에 이르는 동네로, 마을 이름은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침인 정릉(貞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이다. 태종이 즉위하고 태조가 승하자 정릉은 한성 밖으로 옮겨졌지만 '정동'이라는 이름은 계속 남아 지금까지 서울 법정동 이름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번에 서울의 근대사 흔적을 찾아보기 위한 곳으로 정동을 고른 까닭은 그 당시 정동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열강들의 이권다툼이 치열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 정동은 대한제국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동 일대를 살펴보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 격동의 역사 흔적을 찾아보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정동 일대 답사 경로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도보해설관광'에서 마련한 '모던타임즈 인 정동' 경로를 따랐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1900년 모던 정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란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