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종교개혁의 배경
1.1. 정치적 상황
1.1.1. 서임권 논쟁
서임권 논쟁은 교황 그레고리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 간의 성직 임면권을 놓고 벌어진 권력 다툼이었다.
서임권 논쟁 이전까지 황제가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고 교황 및 주교의 임면을 좌우하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교황권을 확립하고 로마 교회를 정화한 후 세속권에 도전하였다. 그레고리 7세는 성직매매를 금하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엄히 지시하였으며, 성직 임면권과 교회재산의 감독권을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리 하에 두었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 반대파와 결탁하여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는 독일 토지의 삼분의 일이 주교와 교회의 소유이므로 교회재산의 감독권이 교황에게로 돌아가면 독일 황제의 실권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76년 교황은 황제의 성직 임명을 금하는 교서를 발표하였고, 황제는 이에 불복하여 밀라노의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 교황과 황제는 화해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고, 황제는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결국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놋사 성 앞에서 밤낮 사흘 동안 교황에게 참회하여 파문해제를 받았다. 이로써 황제는 교회의 계획을 저지하였지만, 반대파 제후들의 반란으로 인한 내란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서임권 논쟁은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다툼이었으며, 이는 중세 정치 권력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1.1.2. 보니파스 8세와 필립 4세의 갈등
보니파스 8세와 필립 4세의 갈등은 교황권과 세속권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보니파스 8세는 교황권의 주창자로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가였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을 중재하려 했으나 양국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양국이 군비 조달을 목적으로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하자 성직자들이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보니파스 8세는 교직과 평신도라는 교서를 내려 교황의 허가 없이 성직 소유에 과세 또는 납세하는 자는 파문한다고 선포하였다. 프랑스왕 필립 4세는 이에 화폐 반출 금지령으로 대응하여 교황청의 수입과 이탈리아 은행가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교황은 성직자들의 자유 헌금을 허락하고 위급 시 왕이 과세할 수 있다고 하여 필립왕이 승리하였다. 이후 양측은 수년간 평화로웠으나 1301년 필립이 교황의 사절인 파미에르의 주교를 반역죄로 체포하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황은 우남 쌍탐이라는 교서를 통해 교회가 영적인 검과 세상적인 검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의 권력은 영적 권력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필립은 교서를 불태우고 교황을 이단과 도덕적 부패의 죄로 탄핵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아나그니에서 교황 보니파스 8세를 잡아 투옥하였다. 교황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나 한 달 후 죽었다. 이로써 세속권에 대한 교황의 정치적 지배 희망은 영구히 실현 불가능해졌고 교황권은 점차 몰락하게 되었다.
1.1.3. 요한 22세의 파문령
1300년대 초기에 있었던 교황의 교권과 황제의 제왕권 사이의 싸움에 성직자들은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독일 바이어른의 루드비히 왕은 교황권으로부터 세속권을 보호하려고 하였고 이에 교황 요한 22세는 루드비히의 정적인 오스트리아의 프레데릭 왕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1322년 정적인 프레데릭을 물리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 인정하지 않자 북부 이탈리아를 상대로, 나중에는 로마 시까지 침공하여 스스로 황제 위를 오르고 또 하나의 교황을 세웠다."이는 교황권과 제왕권 간의 갈등으로 인한 교황의 파문령이었다. 이로써 교황청의 포로화와 권위의 추락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1.1.4. 교황청의 아빙뇽 포로와 분열
보니파스 8세와 필립 4세의 갈등 이후 교황권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필립 4세가 보니파스 8세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청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황청의 아빙뇽 포로로 이어졌다.
필립 4세는 교황 클레멘트 5세를 옹립하였고, 클레멘트 5세는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빙뇽으로 옮겼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이를 "아빙뇽의 포로" 또는 "바벨론의 포로"라고 불렀다. 이 기간 동안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고, 교황청의 권위와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교황청의 아빙뇽 이전은 로마와 교황청이 동일시되었지만, 아빙뇽 시기에는 교황청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로마와 교황청의 관계가 분리되었다. 이는 교황권의 약화로 이어졌고, 교황청의 세속화와 타락을 초래했다. 교황청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상은 점점 심각해져 갔고, 이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아빙뇽 포로 시기가 끝난 후에도 교황청의 분열은 지속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돌아왔지만, 일부 추기경들이 반대하여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다. 이로써 약 40년간 교황청 내부에 두 개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 분열이 일어났다. 이를 "대 서방 분열"이라고 한다.
대 서방 분열 시기에 교황청은 내부적으로 크게 갈등하였고, 교회의 권위와 신뢰도가 크게 하락했다. 이러한 교회의 혼란상은 종교개혁 운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교황청의 아빙뇽 포로와 대 서방 분열은 결국 교회의 타락상을 드러내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1.1.5. 신성로마제국과 칼 5세
신성로마제국은 300명의 봉건 영주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7선제후에 의해 스페인 출신의 칼 5세가 황제로 다스리고 있었다. 칼 5세는 막강한 합스부르크 가문에 출생한 자로 막대한 지역을 유산으로 차지하였다. 그는 1520년 20세의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을 차지하여 자기의 왕조가 유럽 및 전 세계의 주도권을 잡도록 전심전력하였다.
칼 5세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40년 간 4개의 전쟁을 치르는 숙명의 대결을 벌였다. 칼 5세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영에 몰두함으로 독일의 일은 관심이 없었고 그 결과 북부 독일에서는 개신교 제후들이, 남부에서는 카톨릭 제후들이 자기 영역에서 확고한 주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북부 독일에서 제후들의 협조와 보호로 루터의 종교개혁이 착착 진행될 수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칼 5세와 동맹을 맺어 루터를 제거하고 종교개혁을 분쇄하도록 촉구하였는데, 칼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과 오스만 터키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였다. 그 결과 독일 제후들은 루터를 이단으로 선고하고 그의 서적과 인쇄물의 판매를 금지시킨 보름스의 칙령을 무시하고 종교개혁을 촉진시켰다.
작센의 프레데릭 선제후는 루터의 강력한 후원자로 보름스 칙령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바르트부르그로 피신시켜 종교개혁을 성사시켰다. 이렇게 칼 5세가 프랑스와 오스만 터키의 협공을 받아 독일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사이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1.2. 경제적 상황
1.2.1. 중세의 장원제도와 신흥 계층의 등장
중세 초, 중기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토지는 거의 귀족과 교회가 차지했으며, 농민은 소작인 내지는 농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들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착취를 당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상인, 선원, 기업가, 은행가 등 도시의 신흥 자유시민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전반에 들어서면서 교황과 황제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러한 경제적 신흥세력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힘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나 독일의 휴거가 가문과 같은 경제적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은행을 개설하여 교황이나 황제 등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이를 통해 경제적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크게 확대하였다.
예를 들어 함스부르그 왕가가 칼 5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제후들에게 줄 백만 금화가 필요했는데, 이를 휴거가로부터 빌려야 했다. 또한 교황청도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휴거가의 돈을 빌려야 했다. 이와 같이 교황청의 재정 확보를 위한 면죄부 판매 문제가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즉, 중세 사회에서는 토지와 교회가 지배하는 봉건제도가 지배적이었으나, 십자군 전쟁 이후 상업과 금융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2.2. 면죄부 판매와 로마교회의 재정 문제
중세 말기 로마카톨릭교회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교황청이 면죄부 판매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것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면죄부 제도는 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죄를 지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