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성서와 종교개혁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위클리프의 생애
3. 위클리프의 철학사상
3.1. 실재론적 형이상학
3.2. 존재와 시간 개념
3.3. 성경관
4. 위클리프 개혁사상의 등장배경
4.1.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4.2. 교회의 부패와 타락
5. 위클리프의 정치적 개혁사상
5.1. 소유권과 권력에 대한 견해
5.2. 국가와 교회의 관계
6. 위클리프의 사회·경제적 개혁사상
6.1. 교회의 부와 성직자 문제
6.2. 사유재산과 공동체 이상
7. 위클리프의 종교개혁 사상
7.1. 성경의 권위와 보편성
7.2. 교회관과 성직자에 대한 비판
7.3. 성찬론: 화체설 거부
8. 위클리프 개혁사상의 영향
8.1. 14세기 영국 농민봉기에 끼친 영향
8.2. 16세기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에 끼친 영향
9. 결론
10.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4세기는 유럽사에서도 역경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재난의 시기였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전환기로의 진통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과 그 영향으로 전시대까지의 인구증가 추세는 멈추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였으며 서서히 봉건사회의 해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英·佛 간의 백년전쟁과 Richard 치세의 정치 혼란은 전쟁으로 인한 전비의 충당과 때마침 몰아닥친 대기근과 흉작으로 농민 생활을 최악의 상태로 몰아 갔고, 여기에 오히려 부역을 강화하고자 하는 이른바 영주의 봉건적 반동은 농민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저항운동을 낳게 하였다. 한편 교회의 축재과 교황청의 부당한 권력행사는 당시의 사회적 모순 속에서 더욱 심각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Wyclif의 聖餐論 곧 化體設 敎理의 부정과 교회혁신 운동은 당시 교회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개혁 욕구, 그리고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과 일치하여 이들의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2. 위클리프의 생애
위클리프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위클리프는 약 1330년경 영국 노스리딩 요크셔 지방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약 10년 이상을 철학 연구에 몰두한 젊은 학자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360년에는 발리올 대학의 선생이 되었다. 이후 1361년에 링컨셔에 위치한 교회의 교구 사제직을 얻었지만, 여전히 문학석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1372년에는 드디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374년 영국과 로마교회 사이에 정치, 경제적 문제와 교회-국가 관계에 대한 의견대립이 있었을 때, 위클리프는 영국 대표로 참석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회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 돌아와 그의 유명한 정치 논문 "신적통치와 시민통치"를 썼다. 이후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위클리프의 주장을 비판하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그와 교황청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378년 교황청의 대분열로 인해 위클리프는 완전한 교황 반대주의자로 돌변했다. 이에 따라 그의 관심사도 정치적인 것에서 신학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화체설을 부정하면서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이 심화되었다. 옥스퍼드는 그를 정죄했고, 심지어 그를 지원하던 곤트의 존조차도 그에게 침묵할 것을 권고할 정도였다.
1381년 위클리프는 『Confessio』를 저술하며 옥스퍼드의 생활을 마감하고 자신의 교구인 루터스워드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이때 대대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반란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그의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1382년 그의 추종자들이 파문되었지만, 곤트의 존의 보호로 위클리프 자신은 파문을 면할 수 있었다. 1384년 12월 31일 위클리프는 향년 54세로 루터스워드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1415년 콘스탄스 교회회의에서 다시 정죄를 받아 시신이 파내어져 불태워졌다.
3. 위클리프의 철학사상
3.1. 실재론적 형이상학
위클리프의 실재론적 형이상학은 그의 개혁사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위클리프는 처음에는 오캄주의적 유명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실재론자로 변화하였다.
위클리프의 실재론에 따르면, 선, 인간 등과 같은 모든 보편개념은 자존(Self Subsistence)하는 실재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존재인 물질적 존재로부터 더 높은 잠정적 존재, 그리고 최고의 지성적 존재인 하나님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특히 영원한 존재의 속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형에 속한다고 보았다. 즉, 그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형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의 일부라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 존재의 일부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미 시간 밖에 존재했고 따라서 영원하며 불멸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존재의 상호 연관성은 그를 범신론에 접근하게 하였다. 그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정립하면서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위클리프는 모든 존재의 영원성을 주장하면서, 현존하는 모든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 구분없이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영원하고 불멸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클리프의 실재론적 형이상학은 그의 성경관, 성찬론, 교회론 등 핵심 사상을 이해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당시의 주류적인 유명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이후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2. 존재와 시간 개념
위클리프는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그리고 시간 개념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하나님 속에 영원히 내재하는 원형을 갖고 있다. 즉 개별 존재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이며 본질적으로 영원하고 불멸하다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시간 개념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하나는 영원한 시간인 "듀레이토(duratio)"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템프스(tempus)"이다. 그는 이 두 시간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완전한 독립이나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창조는 곧 개별자의 출현이며, 이는 보편적 존재에서 특수한 존재로의 구분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는 듀레이토에서 템프스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위클리프의 이러한...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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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및 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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