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존 웨슬리 이해하기
1.1. 청교도와 영국 국교회의 영향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통치하던 시절, 협상을 통해 통일령과 공동 기도서에 이의를 제기하며 열정과 원칙에 충실하자는 운동이 영국 국교회 안에 일어났다. 당시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정책에서 로마 가톨릭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였고, 이들은 이후 청교도라 불리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필요한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1715년 존 웨슬리가 아직 소년에 불과했을 때 비국교도의 수는 500만이 넘는 영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25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존 웨슬리는 어린 시절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정도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혈통을 통해 비국교도의 유산을 전수 받았다."
1.2. 거룩과 성화의 재발견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마쳐질 즈음, 존 웨슬리는 여러 면에서 성숙 발전하였고, 영국 국교회의 사제가 되는 과정을 밟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에게 사무엘은 존에게 목회를 위한 동기를 아주 철저하게 살피라고 요구하였고 이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 이웃을 교화하고 구원시키는 것"이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를 포함시키라고 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사제로 목회하는 일에 부름 받았음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존은 "경건한 친구"를 만났다. 경건한 친구가 누구였든 웨슬리는 그로부터 종교의 목표인 내적 경험의 중요성을 배었고 이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1725년이 되기 전 어느 땐가 웨슬리는 "몇몇 루터주의 저술가들과 캘뱅주의 저술가들"의 책에 빠진 적이 있다. 이 책들은 순종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다른 계명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웨슬리의 믿음을 어지럽게 해 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독서 습관이 그로 하여금 더 큰 통찰과 돌파구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1725년 존 웨슬리는 거룩한 삶의 전통에 있었던 경건주의자들을 잡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중세의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웨슬리에게 가르친 것은 살아있는 종교는 언제나 마음의 변화,?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한 기질의 변화와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아 켐피스,?제레미 테일러,?윌리엄 로로 이어지는 세 영성가의 책을 읽었던 웨슬리는 정성과 헌신을 다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성화 혹은 거룩함을 종교의 목표요 목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하였다.?예를 들면,?그는 종종 관습적이고 외적인 종교에서는 간과되었던 의도의 순수성이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품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임을 깨달았다.?또한 어느 정도 웨슬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바를 인식하였다.?이 점에서 웨슬리는 자신의 모든 생각,?말,?행위에 이르는 도덕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는 철저한 방식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이 분명하다.
1.3. 조지아에서의 도전과 좌절
웨슬리는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존버튼 신부를 만나 식민지의 조지아 주 선교사가 되어줄 것을 간청받았다. 숙고와 기도를 통해서 웨슬리는 마침내 선교사로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웨슬리는 선교사로 가는 이유에 대해 "내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을 "한탄스러운 죄인"이자 "어리석고 상처를 주는 여러 가지 성적 욕망에 빠져 있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1735년 10월 14일 존웨슬리는 갓 사제 서품을 받은 동생 찰스와 함께 조지아로 출발하였다. 연안 부두에서는 데이빗 니치만이 인솔하에 헤른후트로부터 온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시몬즈호에 올랐다. 시몬즈 호의 항해 중 커다란 폭풍을 겪었는데, 이때 모라비안 교도들의 용기와 침착함은 웨슬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꼈고, 이는 그의 구원론적 기준을 보여준다.
1736년 2월 4일 조지아 주의 소나무 숲이 시몬즈 호의 돛대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한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이 쓰는 막사에서 기거하며 이들의 경건한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삶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웨슬리는 이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스팡겐베르크에게 자신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행위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당신 안에 증인을 갖고 있는가?"와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증언이 부족했음을 알게 되었다.
조지아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에서 온 사람들과도 만났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단호하고 용기가 넘치는 개신교도들이었는데, 웨슬리는 이들을 통해 요한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두 형제에게 조지아 선교의 시작은 아름다웠지만, 곧 어렵고 아픔을 남긴 목회가 되었다.
서배너와 프레데리카에서 웨슬리의 목회는 그의 회중들에게 많은 원한과 아픔을 안겨주었다. 웨슬리는 비국교도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베풀었고, 세례 시 세 번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건강상 문제와 서기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음과 악의에 찬 중상모략 때문에 찰스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찰스가 갑자기 떠나자 존 웨슬리는 서배너의 목회지를 떠나 프레데리카로 향하였지만, 프레데리카에서의 신도회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