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설야 과도기, 마르크스주의 비평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한설야의 생애
2.1. 집안의 분위기와 아버지의 모습
2.2. 정신적인 깨달음 그리고 북경
2.3. 이념으로서의 '동경' 유학과 체험으로서의 '만주' 이주
2.4. 프로문학가 한설야와 그의 귀향
2.5. 출옥과 두번째 귀향
2.6. 해방
3. 한설야의 문학적 특성
3.1. 자연주의적 실험과 사회과학적 관심
3.2. 만주 체험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3.3. 리얼리즘과 현실 참여
3.4. 전향과 자기비판
4. 한설야 문학의 재평가
4.1. 문학사적 의의
4.2. 월북 작가에 대한 이해
5. 결론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월북 작가'라는 점 때문에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평가이자 작가인 한설야는 그 연구에 있어서 큰 가치를 가진다. 카프(KAFF)라는 프로 단체 가입뿐만 아니라 그 단체 속에서 그 입장이 매우 특이하며 완벽한 전향 작가라고 언급할 수 없는 독특한 전향방식을 가진다는 것에서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한설야의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보기 위해 그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한설야의 생애
2.1. 집안의 분위기와 아버지의 모습
한설야는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주군 주서면 나촌이라는 농촌에서 2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설야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한직연이 조선시대 말기에 군수를 지낸 재산가이자 지주였으며, 어머니는 농촌 출신의 순박한 사람으로 사치적인 성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설야는 그 중에서도 조용한 성격을 지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개인적 삶에 관련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집필한 소설에서 한설야는 토착 지주계급이면서 글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던 한 씨 집안의 분위기와 훗날 작가의 어린 시절이 평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집안에 우환이 닥친 것은, 러일전쟁 전후 함경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때문이었다. 명망가들로 구성된 선무반이 조직되었고 여기에 한직연이 강제로 포함되게 되었는데, 그는 이듬해 이 선무반에서 탈출하였다가 곧 붙잡히게 된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이제마의 제자이자 한직연의 동료인 '신좌수'의 편지였다. 이 편지가 발견되는 장면을 한설야는 그의 소설에서 그리고 있다. 아버지가 수배되고 일본인 헌병이 잡으러 다니는 상황은 당시 어린 한설야에게는 부정적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 역시 입에 담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 사건은 한설야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충격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2.2. 정신적인 깨달음 그리고 북경
한설야는 함흥 고등보통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게 되는데, 그가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시기는 1919년이었다. 그 당시는 민족 해방 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 한설야는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개월 간의 구금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 한설야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사람이 자기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고 생명까지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문학이라는 것을 연구하고 자신의 주업으로 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함흥 법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교내 문제로 일어난 동맹 휴학 사건에 연루되어 제적당하고 만다. 이때 한설야의 숨통을 틔워준 곳이 북경이었다. 한설야는 1920년 북경에 가서 형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일본 논문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익지 영문학교에 다니면서 사회과학을 공부하였다. 북경 익지 영문학교 그리고 후에 일본대학에서 문학보다는 사회과학에 전념하였다고 알려진 한설야는 바로 그의 부친 한직연의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이다.
2.3. 이념으로서의 '동경' 유학과 체험으로서의 '만주' 이주
1921년 봄 서울로 돌아온 한설야는 한 여인과 사랑을 하나 실연하고, 그해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공부보다는 사상과 이념에 관한 서적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는 서울에서 K라는 여인과의 실연이 관련 있으며, 또한 이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1923년에는 일본 대지진으로 인하여 휴학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1925년까지 북청고보 학술 강습소 강사로 있으면서 습작생활에 몰두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수 편의 소설을 창작하여 서울에 있는 잡지사나 신문사에 투고하였고, 그 중 「그 날 밤」이 1925년 1월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된다.
이처럼 동경에서의 유학생활은 한설야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
참고 자료
문영희, 「한설야 문학연구」(시와시학사, 1996)
서경석, 「한설야 - 정치적 죽음과 문학적 삶」(건국대출판부, 1996)
조영복,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돌베개, 2002)
이기봉, 『북의 문학과 예술인』, 사사연,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