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구원의 보장과 탈락
1.1. 들어가는 말
이 주제는 교단마다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교단의 분열에는 정치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만,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구원론에 관한 갈등이 가장 첨예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구원의 보장과 탈락, 모두 가능한 이야기다. 무슨 말인가? 나는 내 구원이 탈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구원의 확신과 안정감을 갖고 있다. 이 주제는 사전 설명을 필요로 한다. 구원이라는 주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론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개념(종말론적 시간)을 적용하여 이해하지만, 유독 구원론에는 이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구원론의 조직신학적 이해에 갈등이 있다.
1.2. 종말론적 시간이란?
우리는 역사 가운데 평범한 시간을 살아가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시대의 성격이 어떠한가? 아주 '독특하다'라고 말한다.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실제 종말은 아니지만, 종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이라는 단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의 긴장이 생긴다. 그 유명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다. 이 개념은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적용한다.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많은 사람이 침노하는 중에 있으며, 어떤 사람은 실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 나라(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종말론도 마찬가지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 개념에 모두가 동의한다.
1.3. 유대인의 구원관으로부터의 변형
유대인의 구원관으로부터의 변형이다. 유대인은 '아직'(not yet)이라는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상태이기에 구원의 보장과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율법을 대표하는 4가지: 할례, 음식법, 안식일, 절기)을 지키며 살아가면, 유대인으로서 종말에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종말론과 구원론에 변형을 일으키며 종말을 가져오시기보다(물론 종말을 가져오셨다) '종말론적 시간'을 만들어내셨다. 그리스도의 사건(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그분의 모든 생애)에 종말의 의미를 담았지만, 실제 종말은 아닌, 독특한 시간이다. 이 독특한 시간은 구원론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종말론적 사건을 구원론에 적용하는 데 상당히 인색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원론의 조직신학적 이해에 갈등이 있다.
1.4. 보장과 탈락
1.4.1. 구원의 탈락
구원의 탈락은 성경에서 두 가지 입장을 공히 드러내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실재했지만,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홍해는 구원을, 가나안은 천국을, 광야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상징한다. 그런데 홍해를 지나 광야에 사는 백성 가운데 상당수가 심판을 받았다. 이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탈락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가 짙게 깔려 있다.
신약은 이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어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탈락을 경고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0:1-11에서 바울은 구약의 홍해 통과와 광야 생활을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경고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죄의 등급과 처리방식이 다르다. 여기에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나타난다.
베야드라마(Beyadh arama)라고 불리는 이 죄는 반역죄로서, 신약에서는 성령훼방죄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인자(예수)를 거역하면 용서받으나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 죄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도 범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로서 바나바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요한일서 5:16-17에서도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한다. 여기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언급된 대상은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히브리서 역시 경고 구절로 유명하다. 히브리서는 경고 내용이 실제 가능성이 없는 경고가 아니라고 말한다. 경고의 효력과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믿음에 파선한 사람들이 있었다(딤전 1:19). 진리를 아는 후에 지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2:21에서는 의의 도를 안 후에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 알지 못하는 자들보다 낫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은 구원 받은 이후에도 탈락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만 그 탈락은 스스로 멀어지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이지,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지어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지 않아 멀어지다가 결국 성령훼방죄와 같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1.4.2. 구원의 보장
구원의 보장은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가 결코 그 구원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개념이다. 구원의 보장에 대한 근거는 요한복음 10:27-29, 로마서 8:38-39 등의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암시하는 구절들도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이후에도 탈락한 사례가 있으며, 신약에서도 죄를 지어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가 언급된다. 히브리서와 요한일서에서도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경고가 나온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의 보장과 탈락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이미 보장되었지만(이미) 여전히 구원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아직)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회개할 마음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후에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거나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성령을 훼방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상 절대 구원을 잃지 않는다. 이처럼 구원의 보장과 탈락 가능성은 성경의 가르침 안에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5. 보장(이미)과 탈락(아직) 사이에서
보장(이미)과 탈락(아직) 사이에서"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이야기는 성경에 공히 나타난다. 종말이라는 주제도 '이미'와 '아직'을 함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서도 두 가지 (종말론적) 시간을 함께 끌어안는 것처럼, 구원에 있어서도 두 가지는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더욱이 종말과 하나님 나라는 구원과 아주 긴밀하며, 성경에서도 같은 차원에서 설명한다.
서두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서도 탈락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하였다.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데, 어떻게 지금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윗 단락에서 설명했듯, 그 기준은 '회개'다. 내 안에 진정으로 회개할 마음이 남아 있다면 구원 받으며, 그것을 근거로 확신과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지금 회개할 마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탈락의 가능성이 짙다고 할 수 있겠다.
바울도 구원의 확신과 탈락 사이에 늘 긴장하면서 성도들에게도 권면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바울은 태초부터 예정된 그분의 계획 가운데 열매로서 존재하는 상황에 감사하며 찬송하지만,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 중에 있음을 잊지 않았다.
즉,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시간 속에서 구원의 문제를 이해해야 하며, 실천적으로는 확신과 긴장이라는 건전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1.6. 나가는 말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보장을 강조하였다. 구원의 울타리로 이해했던 가톨릭교회로부터 나와서 개별적인 구원이 가능한가, 의심하는 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하다 보니 방종하는 일들이 나타나 부단히 경계하며 거룩한 삶에 대하여서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죽은 이후, 그들의 신학만 남은 상태에서 구원의 보장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