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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서문명의 충돌과 교류
1.1. 페르시아 전쟁과 그리스-페르시아 세력 대립
기원전 550년경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들은 동아시아 지역을 통일하여 거대한 오리엔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섬세하고 체계적인 관료제로 통치하여 안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화폐제도와 도로망 정비를 통해 상업과 교역을 발전시켰다. 다리우스 1세 시기에 페르세폴리스라는 화려한 수도가 건설되면서 페르시아 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들이 무역활동 억제와 참주정 강요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기회로 삼아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기원전 492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은 아티카 지역의 마라톤 평야에 상륙하여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아테네군은 중장병 밀집대전술을 통해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490년의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였다.
패배한 다리우스 1세는 보복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반란으로 인해 원정이 지연되다가,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전쟁을 재개하게 되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약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침략하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에서의 대승으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비록 페르시아의 원정이 실패로 끝났지만, 이 전쟁은 동서양 문명의 첫 번째 충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아테네 민주정과 델로스 동맹 체제를 구축하여 지중해 세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반면 페르시아는 본토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전쟁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으로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1.2.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의 전파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와 에피루스의 왕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기원전 356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필립포스는 당대 최고의 군사지략가이자 권력을 향한 냉철한 합리주의자였던 반면, 그의 모친 올림피아스는 신비적이고 낭만적이며 격정적인 기질을 가진 여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타고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지니면서도 낭만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가르치면서 그를 철저히 그리스적인 인물로 자라나게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길에 수많은 학자들을 대동했으며, 이들이 수집한 거대한 표본과 정보를 새로운 세계에 목말라 있던 스승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전사로서 알렉산드로스의 탁월한 역량은 이미 왕자 시절부터 검증된 바 있었는데, 그는 16살에 트라키아 반란세력을 진압했고 18살에는 유명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기병대를 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의 출중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는 마케도니아의 분열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의 철저한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페르시아 원정은 알렉산드로스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 시기에 그리스 거의 모든 국가들의 모임인 코린토스 동맹회의에서 페르시아 원정이 결의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페르시아 원정은 알렉산드로스의 개인적인 열정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가 직면했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즉 그리스 세계 내부의 알력과 분파주의, 경제 악화와 빈부격차, 그리고 과잉인구라는 악조건 속에서 유랑민의 식민지 확보와 토지분배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제국의 중심부에 도달,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의 도주로를 따라 파르티아와 소그디아나, 박트리아를 거쳐 기원전 327년 초여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대망의 인도 서북쪽 관문에 다다랐다. 하지만 병사들의 지침과 몬순기후, 독사와 해충에 시달리며 전투 의지가 약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병사들을 회유하고 독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원정을 포기하고 고향인 마케도니아행을 결정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영토 내에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 이름 지어진 신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확산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지만, 그의 방침으로 동서 문화의 융합을 위해 이루어진 그리스인과 페르시아 여성 간의 결혼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동·서양 문화의 만남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알렉산드로스의 생존 시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제국이 해체된 이후 약 4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중앙아시아에 그가 건설한 그리스계 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토착문화의 혼합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써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이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로마로 이어진 헬레니즘 문화와 비교하여 더욱 풍부한 양식과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1.3. 간다라 문화와 불교의 융합
간다라 문화와 불교의 융합은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가 만나 새로운 형태의 불교 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기원후 5세기 경까지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발전한 이 문화는 불교 미술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그리스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시켰고, 이후 박트리아에 그리스계 왕국이 세워지면서 그리스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다. 한편 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 이 지역으로 전해졌는데, 그리스 문화와 만나 독특한 간다라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간다라 불교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불교 미술에서는 부처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발자국이나 보리수 등의 상징물로만 나타내었다. 그러나 간다라 지역에서는 그리스 조각 기술의 영향으로 부처님의 입상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불상에서는 그리스 양식의 균형잡힌 몸매와 drapery 표현, 얼굴의 서구적 특징 등이 나타난다.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인도 내부로 전해져 마투라와 같은 지역에서도 제작되었고,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전파되어 동양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석굴암의 불상은 간다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신라의 미의식이 더해져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간다라 문화는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불교 문화를 탄생시켰고, 이는 동아시아 불교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실크로드와 동서문화 교류
2.1. 장건과 서역 개척
한무제의 서역개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장건이다. 장건은 중국 역사에 있어 최초로 서역교통로를 개척한 인물로, 오손에서 파견한 부사들이 서역 국가들의 사절과 대상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공을 세웠다.
장건은 한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일리강 유역에 있던 대월지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과 동맹하고자 139년에 장안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대완, 강거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야 북안으로 옮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도중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126년에 귀국하였다.
장건의 서역답사로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에 관한 지식들이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가 교류되며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공로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한과 서역의 교역길이 다시 열릴 수 있었다. 이러한 장건의 활약은 동서문화교류의 동맥인 실크로드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의 서역개척은 동서문명의 접점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은 동서양의 교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2.2. 반초와 실크로드 복구
반초는 산시성 셴양에서 출생하여 학자인 아버지 반표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에 마음을 두고 뤄양으로 갔으나 사서를 하면서 오머리르 모시는 부담이 크자 무인으로서의 입신양명을 할 것을 결심한다. 그의 선임자였던, 곽거병(?去病)이나 위청(衛?)처럼 타림 분지에서 흉노족을 효율적으로 방어했으며, 한무제의 통치(55-75) 기간 기마부대를 이끌고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전한의 장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