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역사적, 신학적, 문학적)을 해석학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성경을 단순히 신학적인 관점에서만 너무 보려고 하다보니 역사적 정황들이나 문학적인 요소들이 배제되어 보다 액티브하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자 못했던 것 같다. 성경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해를 통해 부족하지만 역사적, 신학적, 문학적인 접근에 근거한 주해를 시작해 보려 한다.
2. 구원의 보장과 탈락
2.1. 종말론적 시간
우리는 역사 가운데 평범한 시간을 살아가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시대의 성격은 아주 '독특하다'라고 말한다.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실제 종말은 아니지만, 종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이라는 단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의 긴장이 생긴다. 그 유명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다. 이 개념은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적용한다.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많은 사람이 침노하는 중에 있으며, 어떤 사람은 실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 나라(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종말론도 마찬가지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 개념에 모두가 동의한다."
2.2. 유대인의 구원관으로부터의 변형
유대인의 구원관으로부터의 변형이다.
유대인은 '아직'(not yet)이라는 한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상태이기에 구원의 보장과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율법을 대표하는 4가지: 할례, 음식법, 안식일, 절기)을 지키며 살아가면, 유대인으로서 종말에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다. 종말은 메시아가 오심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종말과 구원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진짜 메시아가 오셨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시각에서 메시아는 종말을 가져와야 했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제 종말을 (이미) 가져오셨지만, '아직' 완성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나라를 (이미) 가져오셨지만, 나라가 아닌 '참 이스라엘 백성'(교회) 가운데 가져오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재림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래서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종말론과 구원론에 변형을 일으키며 종말을 가져오시기보다(물론 종말을 가져오셨다) '종말론적 시간'을 만들어내셨다. 그리스도의 사건(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그분의 모든 생애)에 종말의 의미를 담았지만, 실제 종말은 아닌, 독특한 시간이다. 이 독특한 시간은 구원론에도 적용해야 한다.유대인의 종말론과 구원에 대한 개념이 기존과 달리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종말이 오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종말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도 그들의 나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런 개념을 바꾸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종말을 가져오셨지만,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종말, 즉 '종말론적 시간'을 만들어 내셨다. 또한 하나님 나라도 그들의 나라가 아닌 '참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 가운데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종말론과 구원론에 변형을 일으키셨다. 유대인의 개념과는 달리 종말과 하나님 나라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3. 보장과 탈락
구원의 보장과 탈락은 교단마다 다른 입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