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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튀르 랭보의 일생
1.1. 유년기와 학창시절
랭보의 유년기와 학창시절은 그의 천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1854년 10월 20일 벨기에 국경 근처의 북프랑스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데릭 랭보는 근처 소도시에 주둔한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대위였고, 어머니 비탈리 퀴이프는 로셰의 농가 출신으로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랭보는 1860년 6세 때 부모의 성격 차이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세 명의 아이들이 샤를르빌의 부르봉 거리에 있는 낡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린 랭보는 이 당시부터 어머니의 강압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862년 8세에 샤를르빌의 로사 학원에 입학하였고, 1865년에는 샤를르빌의 고등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랭보는 학교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1866년 12세 무렵부터는 가톨릭교에서 금기시 한 라틴어의 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1868년 14세 때 황태자의 성체배령을 축하하는 라틴어 시를 지어 감사장을 받았고, 1869년 15세 때는 아카데미의 콩쿠르에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처럼 어린 나이부터 랭보는 뛰어난 학업 성적과 창의력을 보였으며, 특히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청소년기부터 가정과 학교의 권위에 반발하며 반항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이러한 성향은 이후 시인으로서의 행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 청년기의 방랑과 시작활동
랭보는 16세 때부터 파리와 벨기에 등지를 방랑하며 시 활동을 시작했다. 1870년 여름, 그는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도 가출을 감행했다. 그의 행동은 자유와 반항의 표현이었으며, 이때 이미 그의 재능과 과격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의 압압적인 교육을 견디지 못하고 격렬한 반항심을 표출했다. 특히 수학 과목에 대한 거부감이 컸으며, 이는 선생님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랭보는 다른 과목들, 특히 라틴어와 고전 문학 분야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랭보의 모습은 어리고 천진한 한편 반항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1871년 2월, 랭보는 혁명적 정열과 방랑벽에 이끌려 세 번째 가출을 감행했다. 이때 그는 파리의 코뮌 봉기를 목격하며 혁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얼마 뒤 반란군의 모습에 실망하게 되면서 혁명에 대한 정열이 식어갔고, 이후 시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1871년 9월, 랭보의 작품이 폴 베를렌느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랭보는 베를렌느와 파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 시기에 그의 주요 운문시가 창작되었다. 하지만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마침내 1873년 7월 벨기에에서 치명적인 다툼이 벌어졌다.
이렇듯 랭보의 청년기는 반항심과 열정적인 방랑으로 가득했다. 초기부터 그는 프랑스 사회와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특히 폴 베를렌느와의 관계는 그의 시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 폴 베를렌느와의 만남
그즈음, 이장바르로 인해 알게된 폴 드메니에게 보낸 랭보의 시들이 폴 베를렌느에게 보내지게 되면서 랭보와 베를렌느의 만남이 시작되게 된다. 「놀라 얼빠진 사람들」, 「쭈그린 모습들」, 「세관원들」, 「강탈당한 마음」, 「앉아 있는 사람들」 등의 작품을 보낸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짧은 문장의 답장을 보냈다. "네게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낭광이라는 증세가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이 이야기의 연속을 조명해 주기 때문이다. 낭광은 '한마디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의 반항으로, 사회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해 저주를 퍼붓기도 하는 정신병적 증세'라고 한다. 베를렌느는 랭보를 알기 전부터 이미 그와 공모자였다. 베를렌느의 선처로 랭보는 파리로 떠나게 된다. 그동안의 억압과 미칠듯한 울분을 모두 털어버릴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으로... 그러나 그런 랭보의 기대감은 처절하게도 무너지고 말았다. 베를렌느의 초라한 환경을 믿을 수 없었고 그의 가족들이 랭보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 베를렌느는, 그는 수줍어 하는 청년을 마주 대하자 어리둥절했다. 천년은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강철과 같은 눈매를 지지고 있었다. 「쭈그린 모습들」이나 「첫번째 성체배령」 같은 엉큼한 시가 어떻게 성가대 소년 같은 아이의 머릿속에서 싹틀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랭보와 베를렌느는 기묘하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랭보의 초기 운문시의 태반은 이 시기에 씌어졌다. 이 시기에 '눈물', '카시강', '갈증의 희극', '아침의 좋은 생각', '금의 시대', '새 살림' 등의 후기 운문시를 썼다. 또 운문의 대작 '일뤼미나씨옹'은 1872년의 작품이라 추정되고 있다.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선처를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랭보 또한 베를렌느와 한시라도 떨어져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베를렌느는 그의 가족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베를렌느의 가정 상황으로 랭보는 그와 떨어져살게 되고 처자식이 딸린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원조금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랭보는 기가 죽어 어머니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얼마후 베를렌느에게서 몇통의 편지가 왔다. 그중 마지막 편지는 랭보를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제 베를렌느는 가족을 버렸다. 그의 부인을 때리고 머리에는 불을 지르려했다. 베를렌느는 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