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현대 물리학의 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스 베테
1.1. 서론
1.2. 생애
1.2.1. 유년기 시절
1.2.2. 학창시절
1.2.3. 청년 물리학도로써의 시절
1.2.4. 코넬대학에서의 새출발
1.2.5. 2차 대전과 맨하탄 프로젝트
1.2.6. 코넬대학으로의 복귀 & 반핵 운동가로서의 한스 베테
1.3. 업적
1.3.1. 행성의 에너지 생성에 관한 이론
1.3.2. 맨해튼 프로젝트에서의 연구
1.4. 맨해튼 프로젝트
1.5. 논의
1.6. 맺음말
2. 파동의 원리
2.1. 광전효과
2.2. 열전자 방출
2.3. X-선의 원리
2.4. 파동의 종류와 에너지
3. 현대물리학 이론 소개
3.1. 우주론
3.1.1. 과거의 우주론
3.1.2. 현대의 우주론
3.1.3. 우주의 종말
3.2.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3.2.1. 특수 상대성 이론
3.2.2. 일반 상대성 이론
3.2.3. 양자역학
3.3. 끈이론
3.3.1. 끈이론의 역사
3.3.2. 끈이론 이해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스 베테
1.1. 서론
물리학은 극미한 소립자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분야마다 학문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고 그 후의 학문적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학자들이 현존하고 있다. 특히 진정한 석학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학문하는 대가로서 누리는 학자적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 인류 사회에 길이 남을 긍정적 영향도 꼽을 수 있다. 이로 볼 때, 현존하는 물리학의 석학으로는 가장 먼저 미국 코넬 대학교 물리학과 명예 교수인 한스 베테(Hans Bethe)박사를 들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그의 과학적 업적 외에도 당시 그를 둘러싼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어떤 역할과 고민을 해야 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
1.2. 생애
1.2.1. 유년기 시절
베테는 1906년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생했는데. 그 무렵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공황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 국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반해 베테는 생리학 교수인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해서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런 까닭에 "tender boy"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조용한 소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테는 아버지의 월급을 관리하며, 매일 어마어마한 숫자의 월급을 식료품으로 바꾸는 일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제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때 생겨난 경제학적인 관심은 지금까지 이어져 신문의 경제난에 칼럼을 기고할 정도로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베테는 유년기 시절 전국가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풍족한 시절을 보냈으며, 허약한 몸에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지냈다. 그러나 수학과 경제 및 동화책을 즐겨 읽으며 지금의 한스 베테가 있게 한 밑바탕을 어린 시절부터 다져나갔다.
1.2.2. 학창시절
베테는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물리학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수학과 물리학, 이 두 학문 사이에서 흔들리던 베테는 결국 물리학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학은 너무나 분명한 것을 입증하는 학문 같아서(mathematics seemed to prove things that were obvious.) 수학과 물리학 두 가지를 다 좋아했지만 결국은 물리학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1.2.3. 청년 물리학도로써의 시절
베테는 1924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교수가 그의 재능을 감당하지 못하여 당시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아놀드 좀머펠트 교수 밑으로 보냈다. 당시 좀머펠트 교수 밑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그, 루돌프 파이엘스, 라이너스 폴링, 에드워드 콘돈, 애드워드 텔러등의 수재들이 모여 있었다. 베테는 이들과 함께 수학하게 된다. 박사학위 취득 후, 장학금을 받아 캠브리지의 캐븐디쉬 연구소에서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물리학적 지주, 엔리코 페르미의 연구실에도 머물렀었다. 베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뮌헨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연구해 192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자 회절 이론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관찰자료들을 이해하는 데에 아직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결정체 안에서 항(項)분할에 관한 1929년 연구는 결정체 안에서 한 원자를 둘러싸고 있는 대칭적인 전기장이 그 원자의 에너지 상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물리학도로 승승장구하던 베테에게 시련의 시기가 닥치게 된다. 1930년대 극심해진 독일 민족주의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불이익을 당했다. 유대인 물리학자들의 업적은 "Jewish physics"라 불리며 공격당하고, 유대인 학자들도 설 땅을 잃게 된다. 베테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 아니며 개신교도였다. 베테는 자신이 유태인이 아니라며 수차례 항의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근무하던 튀빙겐 대학의 교수직을 잃고 1934년부터 영국 브리스톨과 맨체스터 대학에서 피난민 과학자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독일과 나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시련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회상한다. "영국인들은 독일인들에 비해 건강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은 언제나 나를 밀어내고 있다.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간단하다. 난 행복하다."
1.2.4. 코넬대학에서의 새출발
1936년에 코넬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베테는 이후 4년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이론 물리학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이 시기에 당시까지 알려진 물리학에 관한 이론과 실험의 내용을 집대성하여 지에 세 차례에 걸쳐 논문을 썼는데, 이것이 바로 '베테의 바이블' 이다. 이 논문은 후에 모든 물리학도들의 교과서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베테는 코넬대학에서의 4년 동안 물리학 이론 분야에서 업적을 쌓으며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1.2.5. 2차 대전과 맨하탄 프로젝트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함으로써 세계는 전쟁의 와중에 빠져들게 되었다. 전쟁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는 학자들을 현실에 참여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군사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미국으로 옮겨온 뒤, 베테는 나치 정권의 만행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사 관련 연구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법적으로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그의 국적으로 인한 자격제한이 풀린 것은 5년이 흐른 1941년이 되어서였다.
자격제한이 풀리자 베테는 폭탄과 레이더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는 하이젠버그 등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있어서 이미 1938년 핵분열 실험을 성공시키는 등 핵물리학이 매우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보유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에는 이탈리아로부터 피난해 온 페르미가 이미 원자 폭탄에 관한 기본 이론을 정립한 상태였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반 우라늄으로부터 원폭의 원료인 우라늄 235를 추출해 내야 했다.
1942년 여름 베테는 오펜하이머와 텔러 박사와 함께 뉴멕시코주 사막 한가운데 차려진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그 추출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적 가능성을 연구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원폭을 기폭제로 한 수소 폭탄의 개발까지 연구했다. 곧이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인슈타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턴 계획을 승인하고 그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를 임명하게 되자 이들의 연구는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로 실현되게 된다. 로스 알라모스에서의 연구는 베테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 훗날 그들의 연구로 인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인한 피해로 그들에게 많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게 해주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맨해튼 계획을 추진하였고, 베테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폭탄 개발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걱정하여 핵무기 감축과 궁극적인 무기 경쟁의 종식을 주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2.6. 코넬대학으로의 복귀 & 반핵 운동가로서의 한스 베테
전쟁이 끝난 뒤 베테는 다시 코넬 대학교로 돌아간다. 맨해튼 계획의 중책을 맡았던 베테는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걱정하여 곧바로 미국 과학자 연합을 창설하고 핵무기 감축과 궁극적인 무기 경쟁의 종식을 주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는 실제로 사용하기보다 독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개발되었던 원폭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은 비록 종전을 앞당기는 효과가 있었다고는 해도 심히 불행한 일이라고 여겨, 원폭의 수천 배에 이르는 파괴력을 지닌 수소 폭탄만은 개발하지 말자고 나섰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하고, 한국 전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공산주의를 팽창시켜 나가려고 하자 미국 정부에서도 수폭을 개발하게 되었다. 1950년 트루먼 대통령이 그 개발을 지시한 지 2년 후 텔러 박사가 고안한 수폭장치가 성공적으로 실험되었고, 잇따라 소련도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세계는 어쩔 수 없이 핵무기 경쟁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베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핵무기 감축을 주장해 왔다. 그는 "우리가 수소 폭탄을 사용하여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마치 칭기즈칸이 페르시아인들을 몰살했던 무자비한 사람으로 기억되듯 후세의 역사는 우리의 승리보다는 승리를 위해 대량의 인명을 살상하는 데 사용한 수단만을 기억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핵을 무기로서가 아니라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을 강조하고, 핵발전소를 인류의 에너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역설하고 있다. 1958년 제네바 핵 군축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제1차 핵실험 금지 조약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고, 닉슨 정부 시절에는 세이프가드 미사일 시스템 배치 반대 운동을 이끌었으며 1972년의 탄도탄 억지 조약을 지지했다. 수소 폭탄 개발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사이가 소원해진 베테와 텔러의 논쟁은 1980년대에도 이어져 베테는 에드워드 텔러의 값비싼 스타 워즈 계획에 소리 높여 반대했고, 1990년대에도 세계의 핵무기 감축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베테는 "2차 대전 이래로 그 ...
참고 자료
Silvan S. Schweber., Bethe and Oppenheimer : Comparison and Contrast, Princeton, N.J., 2000.
Weber, Robert., 『과학의 개척자들』, 전파과학사, 1992.
여을환 편저, 『사이언티스트 100』, 세종서적, 1997.
오진곤 편저, 『과학자와 과학자 집단』, 전파과학사, 1999.
Scientist from Nobel Prize
Cornell Magazine in the August/September 1995.
www.nobel.se
http://www.cornell.edu
http://images.google.com/images
1. 처음 3분간, S. 와인버그 지음, 전파과학사.
2.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승산.
3. 마지막 3분, 폴 데이비스 지음, 동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