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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크 음악
1.1. 요한 세바스찬 바하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위대한 천재 작곡가이다. 그는 1685년 독일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으며, 8대째 이어온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바하는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독창적이고 기술적으로 난해한 오르간 작품들을 통해 오르간 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약 1,000여 곡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미사 b단조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바하의 음악은 아름답고 정교한 선율과 화성, 그리고 치밀한 대위법적 구조로 뛰어난데, 이는 바하 시대의 음악 관습과는 크게 구분되는 독보적인 스타일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바흐 사후 약 100년이 지나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재발견되며 현대에 이르러 가장 중요한 바로크 음악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바하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계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연주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바하의 음악은 화려하고 웅장한 특징을 보이지만, 동시에 깊이 있고 엄격한 신학적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종교적 맥락에서 창작되었으며, 신을 향한 겸손과 경외심이 잘 드러난다. 또한 그의 음악은 대위법의 정점을 보여주며, 악기 편성과 처리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오르간 작품들은 난해성과 함께 절묘한 화성과 리듬, 풍부한 음색 등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바로크 음악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곡가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음악이 가진 우아함, 기술성, 그리고 깊이 있는 영성은 바로크 음악의 극치를 보여주며, 클래식 음악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1.2. 안토니오 비발디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경 태어난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 교육가이다. 그는 1703년 카톨릭 성당의 사제로 출발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져 1년 후에 물러나 전적으로 음악에 헌신하였다. 붉은 머리를 가져 "빨강머리의 사제"라고 불리웠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까지 베니스의 여자 고아원인 피에타 음악학교의 지휘자 겸 작곡가, 교사,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이 학교를 위하여 모테트와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을 작곡하였다. 특히 비발디가 결정한 3악장(빠른 악장-느린 악장- 빠른 악장)에 의한 협주곡 형식은 J.S.Bach에게 영향을 주어 바로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협주곡 형식이 되었다. 독주와 총주(tutti) 간의 뚜렷한 대조로 바로크 시대의 가장 인기있던 기악 형식인 통주저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비발디의 음악은 생기있고 유연한 리듬이나 시퀸스(sequence)의 효과적인 사용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되며, 다이나믹한 음색의 변화, 변화가 넘치는 악기 편성법과 더불어 그의 음악의 매력을 자아내고 있다. 후세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똑같은 곡을 1백곡이나 써갈긴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정도로 그는 작품 활동에 매우 왕성했다.
비발디의 대표작으로는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 '사계' 등이 있으며, 협주곡 제5번 A장조 '바다의 폭풍우', 제6번 a단조 '즐거움', 제7번 D장조, 제18번 g단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사계'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의 선조가 된 곡으로 알려져 있다.
비발디는 45세 무렵 안나 지로라는 여가수를 알게 되어 순회공연까지 함께 다녔다. 이 시기 그의 평판이 점점 나빠졌으나, 2차 대전 이후로 다시 세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실내악단에서는 그의 협주곡들을 빼놓을 수 없는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고 한다.
1.3. 헨델
헨델(Handel. Georg friedrich, 1685. 2. 23 - 1759. 4. 14 / 영국)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오라토리오「메시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바하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 때까지의 음악의 모든 요소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음악 세계로 비약시켰다고 평가받는다.
헨델의 음악은 감정적이고 멜로디를 바탕으로 하여 세속과 대중을 상대로 웅장하고 상쾌한 음악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중을 상대로 썼으며 극적이고, 웅대하고, 명랑하고, 활달하여 따뜻한 인간미가 흐르는 것이 그의 인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백절불굴의 투지와 정력적이고 활동적이며 강하나 인정미가 넘치는 인간이었다.
헨델은 21세 때 이탈리아 음악을 꿈꾸면서 새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대망을 품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 신진 작곡가로 활약하면서 건반악기의 연주자로서도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 후 하노버 궁정악장의 자리를 차지했고 1710년, 영국을 방문한 이래 영국에 머무르면서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왕궁의 불꽃놀이」, 「수상음악」,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있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1749년 봄,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란이 아텐에서 조정된 것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위해 작곡된 작품이다.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으로 총 4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상음악」은 헨델이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으로, 1717년 6월 17일 당시의 국왕 죠지 1세의 왕실의 템즈강 위에서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되었다.
특히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헨델의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감격스러운 음악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이 작품은 1742년 4월 12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