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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궁극적으로 인간의 질병과 인체를 연구하는 의학에서 임상실험을 포함해서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몸에 직접 실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의학지식의 향상과 의료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체를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이 불가피하다. 인체실험(Human experiment)이란 새로운 약의 효용을 평가하는 임상실험(Clinical trial)으로 부터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생체해부(Human vivisection)에 이르기까지 실험동물이 아닌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의학실험을 하는 것을 넓게 지칭한다. 사실상 인체실험은 의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체실험은 새로운 진단방법이 나올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치료제나 치료법이 나올 때마다 계속 되어졌다. 또한 병의 원인이나 인체에 대한 연구를 할 때에도 인체실험이 행해진 경우가 많았다. 의학의 목표는 인체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의 증진과 인간의 질병의 치료에 있으므로, 아무리 동물실험을 많이 한다고 하여도 인체에 대한 연구를 통하지 않으면 새로운 의학지식과 의학기술의 과학적 정당성이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인류역사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인체 실험은 종종 범죄자, 정신 질환자, 고아, 정신지체부자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잔혹한 인권침해의 결과를 초래해왔다. 그동안 인체실험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도 보건의료 및 의학연구에 대해 윤리적인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2. 인체실험에 대한 역사적 고찰
2.1. 고대의학에서 인체실험과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
고대의학에서 인체실험은 의학지식의 향상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헤로필루스(Herophilus)와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rus)는 신경계 구조를 발견하는 등 해부학에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프톨레미(Ptolemy) 왕가의 지원을 받아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생체해부를 실시했다. 이들은 오직 사형수에게만 생체해부를 했으며, 당시 의학지식 향상을 위해 필수적이었고, 소수의 죄인들의 희생으로 다수에게 이득이 된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당시 의학자인 켈서스(Celsus)는 이들을 "의학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히포크라테스(B.C. 4세기)는 환자의 복리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연구, 진단, 및 치료 등, 의료와 관련된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에게 해를 주지 말라."라고 강조했다. 또한, "테스트를 통해 증명되지 않은 치료법 등을 인체에 시험해 보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의료윤리는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이어서 18-19세기의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인체실험의 논리와 상충되었다. 또한, 의료교육 현장에서 의사들의 인체실험이 환자들에게 위험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2.2.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과 인체실험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과 인체실험이다. 19세기를 통해 근대 실험의학이 발전한 이래 동물 생체실험과 인체실험이 급증하였다. 특히 임상과학이 발전하면서 대학병원의 임상의사들은 규제할 법규가 없는 가운데,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Bedside"를 의사들의 "Laboratory"라고 불렀으며, 질병을 "Nature's experiment"라고 불렀다. 단순한 관찰을 넘어 그들은 환자의 질병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실험을 하거나, 환자의 치료와는 상관없는 시술을 통해 의학 지식을 넓히려고 하였다. 프랑스생리학자 클라우드 버나드는 실험의학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고 인체실험에 대한 명확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1865년에 "인체실험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인체에 고통이나 어떠한 종류의 해를 가하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의 복지에 위협을 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1907년 William Osler는 미국 의사협회 대회에서 인체실험에 대한 윤리 기준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3. 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비윤리적인 인체실험
2차대전(1941-1945) 기간 중, 독일 나치 정권 하에서는 그간의 전쟁과 달리 과학과 의학이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의학 연구가 대규모로 조직화되었고,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국, 독일, 일본 모두 의학 연구를 전쟁의 일부로 간주하였고, 연구 내용 역시 군인들의 질병이나 세균전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연구 대상자들의 복지에 대한 고려는 부족했다.
나치 독일의 인체실험은 우생학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학에 기초한 우생학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개입하여 나쁜 유전자는 제거하고 좋은 유전자만을 남긴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하였다. 나치 정권은 우생학 방법론에 따라 정신병자, 부랑아, 정신박약아, 유전성 질환자, 사회 범법자들을 강제로 불임 시술하였다. 이는 미국에서도 유사하게 이루어졌는데, 특히 1970년대까지 캘리포니아주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대규모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나치 독일의 의료인들은 "국가사회주의(나치주의)는 응용 생물학"이라며 열성적으로 나치 정권에 호응하였다. 히틀러 또한 의사들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나치 정권은 독일 의사계에서 유대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추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의사 수는 급증하였고 월급도 크게 증가하였다.
나치 정권의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은 사회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내과적, 외과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단계가 "유전적 질환이 있는 자손을 예방하기 위한 법률"에 따른 강제 불임 시술, 두 번째 단계가 "안사술(Euthanasia)"을 통한 정신병자, 불구자, 행려 및 "쓸모없는 먹잇감"들의 살해,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집시, 슬라브족, 전쟁 포로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강제 동원이 아닌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사술과 대량 학살에 사용된 시설, 장비, 인력은 정신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나치 정권에 협조한 이들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실험에서 얻은 자료를 미국에 제공하고 러시아에 넘기지 않은 대가로 처벌을 면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의 이러한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이는 현대 의학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의학과 과학이 이데올로기와 결합될 경우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4. 일본의 세균전과 잔학한 인체실험
1935-1936년 세균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시이 시로의 건의로 히로히토 천황 명으로 4개의 세균전 부대가 세워졌다. 그중 관동군의 제731부대는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지휘한 3,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