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사의 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 비교
1.1. 구석기시대 생활상
1.2. 신석기시대 생활상
1.3.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비교
2.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
2.1. 신분제
2.2. 농민생활
3. 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
3.1. 정치·사회 변동
3.2. 사상계의 변화
4.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
4.1. 다원적 국제질서
4.2. 고려의 '외왕내제'
5.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
6. 1862년 농민봉기의 전개 과정과 의의
7. 광무개혁의 내용과 한계
8. 1910년대와 1920년대 일제의 통치 방식 비교 및 식민통치의 본질
9.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과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10. 우리 역사에서 존경하는 인물과 나에게 끼친 영향
11.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과 그 이유
1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 비교
1.1. 구석기시대 생활상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돌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후에 여러 가지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짐승과 물고기를 사냥하여 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여 먹었다. 또한,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지어 살았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이동 생활과 채집, 사냥에 의존하는 단계였다.
1.2. 신석기시대 생활상
기원전 8000년경부터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은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었다. 또한, 돌창이나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면서, 이후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와 피를 재배하여 돌낫이나 뼈낫 등을 사용하여 추수를 하였다. 또한,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도구와 기술이 발전하였으며, 씨족 단위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또한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등의 신앙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아산 암사동 유적, 진도 우수영 유적, 통영 동파 유적 등이 있다.
1.3.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비교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이동 생활을 주로 하였으며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 거주하며 무리를 지어 살았다. 주로 짐승과 물고기를 사냥하여 먹었고,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였다. 도구로는 뗀석기를 사용하여 주먹도끼, 슴베 찌르개 등을 만들었고, 불을 사용하여 생활하였으며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리더의 존재 가능성이 있었고, 사회 계층화는 미약하였다. 신앙 면에서는 자연에 대한 존경과 애니미즘의 씨앗이 있었다.
반면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움집이나 집단 거주지에서 살았다. 씨족 단위의 사회를 형성하여 혈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도구와 기술의 발전으로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였고, 농경, 목축, 직기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앙 면에서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발전하여 토템 숭배와 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
즉, 구석기시대에는 이동 채집 생활이 중심이었지만 신석기시대에 들어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며, 도구와 기술, 사회 구조, 신앙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
2.1. 신분제
삼국 시대의 신분제는 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이 법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으로, 크게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분된다.
왕족과 귀족은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율령을 만들어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하였으며, 신분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대부분 농민이었던 평민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국가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은 주로 노비로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하여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이처럼 삼국 시대의 신분제는 고조선 시대부터 존재하던 신분적 차별이 법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이다. 신분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가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지배층인 귀족은 율령을 만들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였다. 대부분 농민이었던 평민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고, 천민인 노비는 왕실과 귀족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2.2. 농민생활
삼국사회의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의 토지에서 생활하며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유민이었지만 정치적, 사회적 제약을 많이 받았다.
농민들은 국가에 부여된 조세와 노동력 징발 등으로 인해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하여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지주나 귀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 소유는 주로 왕실과 귀족 계층이 하고 있었고, 농민들은 지주에게 일정 부분의 생산물을 바치고 나머지로 생활하였다.
삼국 시대 농민들은 국가의 세금 납부와 공사를 위한 노동력 제공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농민들의 생활 상태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며, 농민들은 여전히 지주와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힘든 생활을 이어나갔다.
요약하면 삼국 시대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의 토지에서 생활하며 세...
참고 자료
한국사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송찬섭·전덕재·이익주·정재훈·염정섭·김태웅·최규진·박태균,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2023),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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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이해』 교재 및 방송강의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5권, 웅진지식하우스, 2011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2005년판, 2013년판을 참고해도 무방함)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 1,2』 『고려시대사 1,2』 『조선시대사 1,2』, 『한국근대사 1,2』, 『한국현대사 1,2』,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