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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원 출신 위인 최윤덕
1.1. 최윤덕의 생애
1.1.1. 무인 집안의 타고난 무신
최윤덕은 1376년(고려 우왕 2) 경남 창원에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를 지낸 최운해(崔雲海)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최운해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던 인물이다. 최윤덕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14세 때는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잡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최윤덕은 무인 집안 출신으로 타고난 무재(武才)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이후 뛰어난 활약을 보이게 되는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1.2. 왜구 격퇴와 무과 합격
1394년(태조 3) 무과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를 따라 서북면 수비에 나서는 바람에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1396년(태조 5) 영해(寧海, 지금의 경북 영덕)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1400년 태종(太宗)이 그를 직접 불러 훈련관 부사직으로 삼았다. 또한 회시에 합격하고도 전시에 응시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여 왕의 명령으로 특별히 무과 복시(覆試) 급제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렇듯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무장으로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1.3. 조선 초기 국경 수비와 축성 활동
최윤덕은 조선 초기 잦은 적의 침입으로 다소 불안했던 국경을 수비하고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국경 방어를 위한 꾸준한 대비와 성 축조에 대해 끊임없이 건의하였다.
1430년 최윤덕은 판중군 도총제부사로 임명된 뒤 도순문사로 다시 파견되어 경상도의 연일(延日)ㆍ곤남(昆南)ㆍ합포(蛤浦), 전라도의 임피(臨陂)ㆍ무안(務安)ㆍ순천(順天), 충청도의 비인(庇仁)ㆍ보령(保寧) 등에 읍성(邑城)을 쌓았다. 이처럼 곳곳에 읍성을 축조하고 각 도의 병기 체계를 정비하는 등 최윤덕은 적의 침략에 꾸준히 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에 대해서도 여연(閭延)ㆍ자성(慈城) 등에 보와 성곽을 축조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에 토관제도(土官制度) 실시를 건의하는 등 국방 체계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최윤덕은 재임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국경 방어를 위한 대비와 성 축조에 대해 건의한다. 이렇듯 잦은 성 축조 건의로 최윤덕은 '축성대감'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창원에 건립된 동상의 좌대는 성벽을 모티브로 디자인 되어졌다. 별칭에서 뿐만 아니라 최윤덕의 국방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은 최윤덕 사후 김종서가 세종에게 고한 내용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최윤덕은 조선 초기 잦은 적의 침입으로 다소 불안했던 조선의 국경을 수비하고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앞장선 초기 조선 국방의 보루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1.2. 최윤덕의 공로와 업적
1.2.1. 조선 국경 완성을 위한 여진족 토벌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토벌은 세종 시대 조선 국경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금나라를 건국할 만큼 강력했던 여진족 세력은 13세기 몽골의 힘이 커지면서 다시 여러 부족으로 흩어졌지만, 조선 초기에도 함경도와 평안도 내륙까지 수시로 침입하며 약탈을 일삼아 조선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는데,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신료들은 함경북도 경원지역의 군사 및 행정기구인 도호부를 남쪽의 용성지역으로 이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단호하게 강역의 축소는 있을 수 없다며, 태종 때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은 공험진 이남부터 철령위까지의 조선 영토를 지키고자 했다.
1433년 평안도 절제사였던 최윤덕은 세종의 명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토벌에 나섰다. 최윤덕의 요청에 따라 초기의 강력한 진압을 위해 3천여 명의 군사가 1만 5천 명으로 증원되었고, 세종은 최윤덕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작전권을 일임했다. 1433년 3월 모든 군사들이 강계부에 집결한 뒤 4월 10일 압록강을 도하해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 철저히 토벌했다.
이로써 조선은 그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정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