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현재 한국 연극은 서양이나 일본 등의 외국에서 기틀을 가져온 연극 형식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1900년대 연극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신파극, 신극, 신연극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문화사는 자연스럽게, 혹은 강압적으로 일본의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연극과 극장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그 연결고리가 일본이었다. 일본의 것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이끌기에 충분했고, 대중들은 탄압 초기 일본의 문화정치란 명목 하에 유희에 열광하였다. 이렇듯 타국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연극 장르지만 한국 연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신파극, 신극 그리고 신연극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현대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극의 흔적들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2. 한국연극사
2.1. 신파극
2.1.1. 우리나라의 신파극
우리나라의 신파극은 191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신극사(新劇史)의 주류를 이루었던 연극 양식이다. 감상적 정조와 과장된 연기양식을 주조로 하는 극의 형태이다. 1910년대 초기에 일제히 나타난 신파극단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민중계몽'을 내세웠다. 이러한 점은 일본에서 신파극이 성립될 때 자유민권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내세웠던 표어와 같다. 초기 신파극에는 군사극·탐정극 등이 많이 공연되었는데, 이는 일본 신파극이 러일전쟁으로 인해 군사극으로, 전시의 오락극으로 변모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는 결말로 구성되었다. 1910년대 극단의 조직형태는 명배우·인기배우 중심의 체제(star system)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인기가 떨어지면 극단의 힘도 약해졌다. 1920년대에 이르면 신파극단들은 일본 작품의 번안에서 벗어나 당대의 현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대치하였고, 무대장치·분장·연기방식도 한국적인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후반 동양극장에서는 상업주의에 성공하기 위해 전속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을 두었고, 고액의 월급을 주면서 당대의 인기배우들을 기용하였다. 이를 통해 1930년대 후반의 신파극을 '고등신파'라 부르게 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연극통제가 더욱 강화되었고, 친일 연극운동이 전개되면서 신파극은 정치적인 선전과 목적을 위한 멜로드라마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그 결과 광복 이후 신파극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2.1.2. 일본의 신파극
'신파(新派)'란 말은 원래 일본에서 처음 쓰인 신극용어의 하나로, 일본의 구파극(舊派劇)인 가부키(歌舞伎) 연극에 대립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신파극은 메이지(明治) 20년대(1887~1986)에 시작된 자유민권운동에서 파생한 정치적 선전극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연극 가부키와는 별도로 발전한 현대 사실극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신파극은 군사극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