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1.1. 한중일 근대 교육의 역사적 배경
중국은 청일전쟁 전후로 동북아의 중심국가 여부가 결정나게 되었다. 근대 시대 이전에는 동북아 국제질서에 있어 중국문화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청국과 조선, 일본의 삼국 국제질서가 이 시기 이전으로 조공질서 중심의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와 조공질서가 청일전쟁을 전후로 큰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처럼 청일전쟁은 전근대국제질서에서 근대질서로 이행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중일 국제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청일 양국간 군사적 대결이었지만, 한반도 내 일본군과 동학의병 간 조일전쟁을 겪은 전쟁으로도 평가된다. 이는 의병을 통해 일본군에 대항하는 조일전쟁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당시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조선관군에 조직적으로 공세를 벌여 세성산 전투와 우금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어 강화도조약, 제물포조약, 톈진조약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정치군사, 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하게 되었다. 반면 청국의 경우 랴오둥반도와 대만, 펑후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해야 했으며, 일본에 2억 냥을 지불하고 구미 열강과 동등한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목적은 우선 조선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처를 위해 전략적 시설을 설치하고,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구축된 불평등조약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이 강제로라도 일본의 속국이 되도록 하는 것도 목적이었다.
1.2.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에 이전부터 존재했던 전통적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마침표를 찍고 주변국이었던 일본을 지역의 승자로 등장시킨 전쟁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 종주국을 자처하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누려왔지만, 청일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일본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로 인해 중국은 영토를 빼앗기고 침략까지 당하게 되어 왕조 붕괴를 대내외적으로 재촉하게 된다.
한편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대한 동아시아 침략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일본은 중국에게 랴오둥반도와 대만, 펑후열도 등의 영토를 할양받고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받는 등 구미 열강과 대등한 위상을 얻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추진하게 된다.
특히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이 됨으로써 이후 인적, 물적 수난을 겪게 된다. 이에 따라 청일전쟁은 한중일 각국의 근대화 방향성을 일본 중심으로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청일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이는 중국과 한국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3.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청일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양상을 알아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청일전쟁은 전근대 국제질서에서 근대질서로의 이행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한중일 삼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통해 중국이 약화되고 일본이 부상하면서 기존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그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와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현재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양상과 향후 전망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본론
2.1. 청일전쟁에 대한 이해
2.1.1.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조선 정부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진압하게 하였으나 장성에서 정부군이 격파되어 전주까지 함락되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청국에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인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의 직례총독이자 북양대신인 이홍장이 파병 요청을 받고 톈진조약에 의거해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가 조선의 청국 파병 요청 사실을 알고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한 후 조선에 혼성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에 대해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일본군을 대규모로 파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모본부에 대본영이 세워지고 혼성여단 선발대가 서울로 진군하였다. 당황한 조선 정부가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이미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 되어 일본 공사와 위안스카이와의 세 차례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철수에 합의하였다.
2.1.2. 경과
청일전쟁은 청일 양국간 군사적 대결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내 일본군과 동학의병 간 조일전쟁을 감내한 전쟁으로도 평가되는데 이는 의병을 통해 일본군에 대항하는 조일전쟁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당시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조선관군에 조직적으로 공세를 벌인 결과 세성산 전투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게 되었고 이어 강화도조약, 제물포조약, 톈진조약 등 일관되게 추진된 조선에 대한 우월 정치군사, 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하게 된다. 청국의 경우에는 랴오둥반도와 대만, 펑후열도 등에 대해 일본에 할양해야 될 지시를 받는다. 또한 일본에 2억 냥 지불과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특성상의 특권을 부여하게 한다.청일전쟁은 동아시아에 이전부터 존재했던 전통적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마침표를 찍고 주변국이었던 일본을 지역의 승자로 등장시키게 한 전쟁으로써 당시 아시아에서 첨예한 갈등을 보이던 영국과 러시아 등과 같은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기회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