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수학적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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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소개글

"한글의 수학적 원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 기술 발전
1.1. 세종대왕의 업적과 시대적 배경
1.2. 천문학 분야의 발전
1.2.1. 혼천의와 천문관측기기 개발
1.2.2. 천문시계 개발
1.3. 의약학 분야의 발전
1.3.1. 동양철학과 한의학의 결합
1.3.2. 유의(儒醫) 제도 도입
1.3.3. 향약 개발과 자급화
1.4. 수학 분야의 발전
1.4.1. 세종의 수학 공부와 관심
1.4.2. 수학 교과과정 및 유학생 파견
1.5. 건축 분야의 발전
1.5.1. 건축 규제와 규모 제한
1.6. 미술 분야의 발전
1.6.1. 한글의 예술적, 과학적 의미
1.6.2. 농민을 위한 실용적 저술

2. 세종 시대 과학 기술의 역사적 의의
2.1. 조선 초기 과학기술의 선구적 위치
2.2.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세계사적 평가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 기술 발전
1.1. 세종대왕의 업적과 시대적 배경

세종대왕은 조선 전기 제4대(재위:1418~1450) 왕으로, 훈민정음의 창제, 집현전 설치와 인재 양성, 예악과 법제의 정비, 과학기술의 발전, 공법 시행과 북방 개척 등 다양한 업적이 있었다. 15세기 초반의 조선은 고려에서 친명으로 정책을 바꾸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태종 때와 마찬가지로 세종 또한 중국에 대하여 사대주의를 취하였는데, 이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명 사신들의 토산물 요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수렵용 매와 사냥개가 특히 문제가 되었다. 명 사신들은 일년에도 수차례씩 입국하여 여러 달씩 체류하였고, 심한 때에는 200마리가 넘는 소바리의 짐을 가지고 귀국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대주의를 주장하여 대명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세종의 대명 정책이 굴욕적인 사대주의라기보다는 실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경학만으로는 실용성이 부족하고 세계관이나 자기반성을 위해 사학의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학문관은 신하들의 사학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수시로 지적하였다. 여기서 세종이 말한 사학연구는 오늘날의 역사학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성어에 나타난 것으로, 왕으로서의 치세나 신하로서 누구나 가져야 할 수신제가의 반성을 위한 실용적인 것을 의미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학문에 대한 태도는 실리, 실용주의와 결합되었으며, 이는 세종 즉위 30여 년 동안 과학 기술 및 문화 발전에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상운 박사(전 성신여대 총장, 동아시아과학사)는 2004년 10월 8일 "15세기 과학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세조 임금"이라는 논문을 통해 세종을 "언어학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자연과학, 산업기술을 발전시킨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통치자" 였지만 "왕조시대에 달력은 황제가 내리던 것이었는데 세종의 자주적인 역법 계산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거스르는 일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편찬한 책에 '역법'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7행성 운동에 대한 천문학적 계산'(칠정산)이라는 학문적 표제를 사용한 것이 중국의 시비를 피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은 국책 과제로서 과학기술정책을 집행하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술혁신을 장려하였다. 정인지의 지도 아래 세종은 당시 대표적인 수학자서인 '산학계몽'을 학습하는 등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실제로 집현전 학자들에게 주어진 연구과제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주어졌으며, 인쇄기술 발전을 위해 주자소 장인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화포 제작을 위해 왕자에게 감독 역할을 맡기고 책임자의 지위를 높이는 등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였다.


1.2. 천문학 분야의 발전
1.2.1. 혼천의와 천문관측기기 개발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준공되었다. 그래서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이러한 혼천의와 천문관측기기 개발은 세종대왕 시대 천문학 분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1.2.2. 천문시계 개발

세종 시대에는 천문시계 개발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세종은 천문관측에 관심이 많았으며, 정확한 시간 측정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해시계와 물시계가 개발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 있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와 종묘 남쪽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남쪽을 알 수 있었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개발되었다. 자격루는 물이 흘러내리면서 종...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세종(世宗))
주장한,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종대왕”, 대한설비건설협회, 설비건설 (대한설비건설협회) 11권 0호, 2005, 107
시장경제신문(http://www.meconomynews.com)
"유일하게 수학을 공부한 임금." 사이언스타임즈. n.d. 수정, 2020년 10월 27일 접속,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C%A0%EC%9D%BC%ED%95%98%EA%B2%8C-%EC%88%98%ED%95%99%EC%9D%84-%EA%B3%B5%EB%B6%80%ED%95%9C-%EC%9E%84%EA%B8%88/.
정태란. "조선전기 수학사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충남대학교, 1999. 대한민국
전북일보 인터넷신문(http://www.jjan.kr)
과학문화교육연구소 홈페이지(http://seer.snu.ac.kr/sceri/)
이숭녕의 "세종대왕의 개성의 고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발자취 찾아서", 과학문화교육연구소, 2004
더 사이언즈 타임즈(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84%B8%EC%A2%85%EC%8B%9C%EB%8C%80-%EA%B3%BC%ED%95%99%EA%B8%B0%EC%88%A0-15c-%EC%84%B8%EA%B3%84-%EC%B5%9C%EA%B3%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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