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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 비교
1.1. 구석기시대의 생활상
구석기시대의 생활상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약 7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구석기 시대로 구분하며, 함경 북도 웅기군 굴포리와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구석기 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돌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후에 여러 가지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짐승과 물고기를 사냥하여 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여 먹었다. 또한,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처럼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이동 생활을 주로 하면서 자연의 혜택에 크게 의존한 채 생활하였다.""
1.2. 신석기시대의 생활상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은 구석기시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한 곳에 정착하는 생활 방식이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특히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가장 이른 연대의 신석기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었다. 또한, 돌창이나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면서, 이후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와 피를 재배하였으며, 돌낫이나 뼈낫 등을 사용하여 추수를 하였다. 또한,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이동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주거 형태, 도구 및 기술, 사회 구조, 신앙 등에서 구석기 시대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1.3.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비교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였다. 이 두 시대는 인류의 생활 방식, 도구 및 기술, 사회 구조, 신앙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구석기시대는 약 26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지속된 시기로, 인류가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인류는 주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여 생활하였으며, 돌을 깨서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 거주하며 무리를 지어 생활하였고, 자연에 대한 존경과 애니미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농경과 목축의 발달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하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 뼈도구 등을 사용하였고, 움집이나 집단 거주지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농경과 목축 기술의 발달로 씨족 단위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등 다양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활 방식에서 구석기시대는 이동 생활을 주로 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둘째, 도구 및 기술에서 구석기시대는 뗀석기를 사용하였지만 신석기시대에는 간석기와 토기 등 더 발달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셋째, 사회 구조에서 구석기시대는 무리 지어 생활하며 리더의 존재 가능성이 있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씨족 단위 사회가 형성되었다. 넷째, 신앙에서 구석기시대는 자연에 대한 존경과 애니미즘의 맹아가 있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더 발달하였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이동 생활과 채집, 사냥 경제에서 신석기시대의 정착 농경 사회로의 이행은 인류 문명 발달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두 시대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원시 생활과 초기 문명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2.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
2.1. 삼국시대의 신분제
삼국시대의 신분제는 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이 법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으로, 크게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귀족들은 과거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정치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은 율령을 만들어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하였으며, 신분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평민들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들은 대부분 노비로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지어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통일 신라 이후로는 정복 전쟁이 사라지면서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되었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신분제는 고조선 시대부터 존재하던 신분적 차별이 법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으로, 능력보다는 가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다. 귀족은 율령을 통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였으며, 평민은 조세와 노역의 의무를 지는 등 많은 제약을 받았고, 천민은 노비로 불자유한 신분이었다.
2.2. 삼국시대 농민생활
삼국시대의 농민들은 주로 자급자족의 농경 생활을 하며 국가 경제의 기반을 이루었다.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할당받아 경작을 하였으며, 수확물의 일정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였다. 농민들은 매년 농번기에 집단적으로 농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하였다. 또한 농사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특정 지역에서는 관개 시설의 발달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농민들은 곡식을 주요 식량으로 하여 생활하였으며, 동시에 어업, 목축, 사냥 등을 병행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대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