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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제국 흥망
1.1. 들어가며
들어가며, 나는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세계사가 3학년 과정에 있었고 대입이라는 현실 앞에 그나마 있던 수업 시간마저 국사 시간으로 대체되어 그리스 로마 이후 시대를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세계사란 적어도 그 당시 우리에게는 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 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탓에 나는 세계사를 깊이 있게 접할 기회가 없었고 관심도 자연히 적었다. 하지만 이번 과제가 자유 주제라는 사실에 세계사의 한 부분인 로마 제국의 흥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로마의 흥망은 세계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을 만큼 그 의의가 크기에 이번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2. 로마의 성장과 전쟁
1.2.1. 군사적 측면
로마 시민의 최고의 의무는 병역이었다. 민회에 출석하려 해도 군대의 일원이어야 했고, 공직에 나서려면 10년간의 군무경력이 필요했다. 로마 군대는 가장 부유한 1계급부터 가장 가난한 5계급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다섯 계급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보병 4천 2백명, 기병 3천명, 그 밖의 병사 약간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만들었다. 군단마다 고유의 군기가 있어 이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여겼으며, 지휘관에 절대 복종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점이 로마 군을 강군으로 만들었다. 로마군의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로마가 여러 민족과 국가를 정복할 수 있었다.
1.2.2. 지중해 진출과 포에니 전쟁
이제 로마는 지중해 진출을 원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페니키아의 시민도시 카르타고와의 대결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로마는 해군을 건설하게 된다. 페니키아인이 튀니스만의 요충지에 건설한 도시 카르타고는 비옥한 평야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여 서지중해의 가장 유력한 상업 국가였기에 로마가 지중해로 진출할 시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상대였다. 로마는 기원전 264년에 시작한 제1차, 기원전 218년에 시작한 제2차, 기원전 149년에 시작한 제3차의 포에니 전쟁에 이르는 약 80년 세월의 절반 이상을 전쟁으로 소비한 끝에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 이 전쟁에서 로마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해군의 건설이었다. 당시에 해전에서 주로 이용되던 전법을 단시일 내로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로마는 카르타고의 허를 찌르는 기습전법을 고안하여 첫 번째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은 해전만 치른 것이 아니었다. 1차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국력을 회복하여 복수를 다짐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개발에 열중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그리스의 식민도시 마살리아와 사이의 분쟁을 계기로 기원전 218년 시작되었는데, 2차 전쟁은 육전이었고 그 주인공은 명장 한니발이었다. 4만 명의 군사와 육로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로 진군, 알프스를 넘어 트라시메노 호 전투에서 로마 군을 격파하였다. 로마와 그 동맹시의 군대가 반격에 나서자,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압승하였다. 이 칸나이의 패전은 로마 시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금새 패전의 병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의 명성을 시샘하여 로마를 무너뜨릴 때까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원조해 주지 않았다. 이를 위기로 차츰 위축되어 갔던 카르타고는 결국 로마에 함락당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로마는 이 와중에도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후계자의 국가들과 동시에 마케도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반(反)로마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이제 로마는 지중해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했고 카르타고가 부흥하기 시작하자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포기를 약속한 카르타고로 쳐들어가 어쩔 수 없이 카르타고가 저항하자 조약 위반을 구실로 삼아 인질과 무기를 인도 받고 카르타고의 이주를 요구했다. 마침내 카르타고도 들고 일어나 싸웠지만 결국 처절하게 로마에 굴복 당했다. 포에니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