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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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족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지역사회와 가계기록의 관계
1.2. 연구의 목적과 접근방식

2. 신분제도의 변화
2.1. 조선전기 신분제도
2.2.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변화
2.3.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도의 영향

3. 가계기록의 변화
3.1. 조선 이전 가계기록의 발전
3.2. 조선 초기 가계기록의 특징
3.3. 조선 후기 가계기록의 변화

4. 신분제와 가계기록의 상관관계
4.1. 족보를 통해 나타난 적서구별
4.2. 중인층의 신분상승과 족보편찬

5. 결론
5.1. 연구 결과 요약
5.2. 신분제와 가계기록의 관계 정립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지역사회와 가계기록의 관계

지역사회와 가계기록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배신분층이 가계기록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공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계기록은 신분을 범주화함으로써 지배신분들 간 결집을 도왔고, 신분변동을 억제하며 신분상승의 기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가계기록은 역설적이게도 신분상승에 활용되기도 했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며 성장한 부민층이 족보 편찬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역관 계층은 족보를 편찬하여 자신들의 사족 출신 뿌리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신분적 변화는 가계기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2. 연구의 목적과 접근방식

본 연구의 목적은 신분제도와 가계기록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신분제도는 조선시대 사회를 지탱하고 구성하던 중요한 제도이자 관념이었고, 가계기록인 족보는 그 중에서도 지배층인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신분제도의 변화와 가계기록의 변화를 시기별로 살펴보고, 이 둘이 어떠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신분제도의 변천, 가계기록의 발전, 그리고 신분제와 가계기록의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또한 제공된 문서들 이외에도 최신 연구 동향을 추가로 조사하여 연구 내용을 보완할 것이다. 이를 통해 신분제와 가계기록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 간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분제도의 변화
2.1. 조선전기 신분제도

조선전기 신분제도는 양반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 양반관료들이 그들의 지주적 관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체계와 신분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말선초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인 신진사대부들은 관제 개편과 신분제 재편성을 통하여 두 가지 요인을 개혁하였다. 관제 개편을 통하여 산직자들에게 주던 국가의 반대급부를 철폐하여 유급산직제를 무급산직제로 바꾸고, 군현제 개편과 토호적 향리의 철저한 제거로 새로운 신분제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재개혁은 왕조교체로 표현되었다.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교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있어서의 일대 개혁이었다.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말선초는 대대적인 신분제 재편성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 신분제 재편성의 방향은 대체로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하나는 지배층의 분화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양인층의 확대이다. 먼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의 새로운 집권자가 된 신진사대부들은 이같이 비대해진 지배계층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지배계층중에서 양반계층을 공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양반계층은 문무의 관직은 받은 바가 있는 자들로 한정하게 되었다. 반대로 양반층이였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들을 한인으로 통칭하였는데 이들은 양반층이 되지 않고 양반 관료 예비군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양반층의 공정은 지배신분중에서 양반과 구별되는 중인층의 성립을 의미하게 된다. 다음은 양인층 확대정책이다. 조선왕조 새로운 집권층이 된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들은 공권을 강화하고 사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귀족, 사원, 토호 등 대토지소유자들의 권력을 삭감시켜왔다. 양반과 양반국가는 상호보험적인 관계에 있었다. 양반지주들은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양반국가를 만든 것이다. 양반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해주기 위하여 사전과 사민이 있어야 하는데 비하여 양반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는 공전과 공민이 필요하였다. 조선왕조의 집권 양반들은 신왕조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사권영역에 속한 사전과 사민을 공적영역에 속하는 공전과 공민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중에 신분재편성에 관계가 있는 것은 사민의 공민화이다. 사민의 공민화 정책으로는 노비화된 양인을 양인화하는 노비편정사업, 태종과 세종조의 대규모 사찰태척에 따른 승려의 환속, 재인와 화척 등 유랑민들의 신백정으로의 정착, 양-천불명자나 양-천후손들을 일천즉천의 신분원칙을 일시 무시하면서까지 이들을 신분을 천인에서 양인으로 오를 수 있게하여 보충대에 소속시켜 1000일만 복무하면 양인화 시켜 주는 조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15세기의 조선왕조와 인적자원과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여 조선 초기에 있어서의 영토확장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올 수 있게 한 것이다.


2.2.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변화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신분제도에 있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첫째, 신분제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신분제도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홍대용과 정약용은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계층 간의 구분 없이 모든 백성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신분과 계급이 일치하던 기존의 양상에서 신분과 계급이 괴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양반호의 급증이다. 양반층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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