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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약의 배경사
1.1. 유대에 영향을 미친 국가들
다니엘의 예언에 따르면 강대국들의 흥망성쇠가 예고되었는데, 이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의 등장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는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벨론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가 카르화의 혼합 사상에 노출시켰고, 페르시아는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은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를 전파하여 유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리아 지배 하에서 유대인들은 강제 헬라화를 겪어야 했고, 이에 항거한 마카비 가문의 독립 운동도 전개되었다.
마지막으로 로마는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유대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고, 헤롯 가문을 통해 유대를 통치하면서 유대 사회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했다. 이처럼 유대는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 아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1.2. 페르시아 시대
고레스(Kyros) 왕에 의해 이스라엘은 해방이 되고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페르시아가 고레스 왕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이후 캄비세스, 스멜디스, 다리오 왕인 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가 다스렸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였지만 그의 나라는 주전 40년 살라미스 전투에서 데미스토클레스 제독에 의해 대패한 후 주전 479년 플라타이아 협곡의 전투에서 정복당하기 시작하였다. 다리우스 III세 때 알렉산더 치하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패배하면서 주전 330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페르시아는 선과 악의 이원론을 발달시킨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였고, 바벨론에 유배되었던 이스라엘의 유목민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로 칼데아의 이란 혼합주의와 접촉하였다.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포로귀환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또한 사마리아에 문화와 종교의 혼합과 더불어 사마리아인들의 불평과 방해로 유대인과 갈등이 생겨났다.
1.3. 헬라 시대
헬라 시대(B.C. 330~142)
거대한 헬라제국의 등장은 이미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예고되었다. 다니엘은 페르시아란 뿔을 가진 수양이 서쪽에서 온 호전적인 수염소 헬라에 의해 쓰러질 것이라는 생생한 예언을 남겨 놓았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은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주전 356년에 태어나 13~16세에 그리스에서 초청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3년 동안 그리스식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20살에 군부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되어 소아시아와 시리아, 페니키아, 티루스, 가자,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메소포타미아와 오늘날 파키스탄의 중심부를 흐르는 인더스강과 마지막으로 인도까지 정복하였다. 이렇게 대규모로 시작된 동방정복은 동방에 헬라의 건축, 지리, 언어, 과학, 경제과 문화 등을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서방의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라는 거대한 업적을 남기고 바벨론의 수사에서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후에 갑자기 열병에 걸려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권력은 그의 자손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네 나라로 분열된 헬라제국은 각 지역에 총독으로 임명된 알렉산더의 뛰어난 장수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된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며 주전 200년까지 헬라인으로서 이집트에서 통치한 프톨레미 왕조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점점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에 들어갔고 유대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톨레미가 주전 312년에 가자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많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끌고 갔다. 초대교회에서 이방이 전도의 중심거점이었던 안디옥은 셀류커스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의 에베소 다음으로 가장 큰 헬레니즘 도시로 성장하였고 개종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최초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유대인들이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고 국제 언어니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70인경(LXX)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장로 6명씩 대표자로 선정된 72명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모세오경이라는 율법을 이방인이 언어인 헬라어로 70일 동안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에스라 시대까지 낱권으로 전해지다가 에스라와 대공회가 39권을 한권으로 정한 책들이 점차 번역되었다. 70인경(LXX)은 예수님과 사도바울 당시에 주로 사용되었다. 프톨레미 시대에 유대는 군사적이고 상업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곳으로 간주되지 못하였다. 단지 유대는 열국들의 전쟁에서 군사도로로 이용되거나 상업을 위하여 이동하는 도로 이용되었다. 예루살렘의 정치와 종교는 산헤드린의 영향 아래 있었다.
1.4. 시리아 시대
시리아 시대(B.C. 200~142)
주전 3세기 말경 프톨레미 4세 시절에 이집트는 몰락하기 시작하고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가 성장하게 되었다. 셀류커스 왕조는 예루살렘에 헬라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여러 민족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암살당하게 된다.
주전 174년에 대제사장이 된 야손의 주도로 헬라화가 가속화되었다. 야손은 예루살렘 성곽 바로 아래 헬라의 체육학교와 운동경기장을 건설하였다. 헬라화딘 도시들은 대체로 이러한 시설들을 구비하였다.
주전 171년에 메넬라아수가 야손보다 더 많은 세금을 시리아 왕에게 바치고 대제사장이 되었다. 아론 계열이 아닌 사람이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은 돈으로 매매할 수 있는 경제와 정치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예루살렘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헬라주의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쿠스 4세가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복직시키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도록 선포하였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고, 폭군의 성이 세워졌다. 제우스의 제단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고 사마리아 성전이 있던 그리심산에도 제우스 신전이 세워졌다. 부정한 짐승인 돼지들이 제물로 드려졌으며 안식일 준수와 할례는 강제로 금지되었다.
이에 마카비와 함께 하시딤이 유대교에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시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통치 아래 율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며, 후에 에세네파와 바리새파로 분리되었다. 하시딤은 율법의 해석에도 관심을 가졌고, 사탄의 영향 아래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영적인 세계와 인간세계를 단번에 제거할 메시야의 구원을 기대하였다.
유다(마카비)를 대신하여 그의 동생 요나단(160~143)이 지도자가 되었다. 요나단은 사마리아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요나단 후에 그의 세 번째 동생 시몬(143~134)이 지도자가 되었다. 시몬은 유대의 대제사장이면서 총사령관이 되어 혼혈인들과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용병을 모았다.
1.5. 하스몬 왕조 시대
사제 군주인 아버지 시몬에 의해 게젤(가자)에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던, 히르카누스 I세는 시몬이 암살당한 주전 134년부터 주전 105년까지 군사적으로 노련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7세가 전쟁에 출전하여 살해당한 때부터 히루카누 I세는 자유롭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유대는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히르카누스 I세는 주전 128년에 세겜을 공격하여 가리짐(그리심산) 위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