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시대 성균관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조선시대 성균관교육 개요
1.2.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
1.3.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2. 본론
2.1. 성균관 유생들의 문화와 풍속
2.1.1. 장의입반
2.1.2. 면책
2.1.3. 소행
2.1.4. 궐희
2.1.5. 순당
2.1.6. 신임 대사성과의 상견례
2.1.7. 서립
2.1.8. 음주습속
2.1.9. 능행지영
2.1.10. 상읍례와 대상읍례
2.2. 성균관 유생의 유벌(儒罰)
2.3. 성균관에서의 교육목적
2.4. 성균관 유생의 유소(儒疏)
3. 결론
3.1. 연구 내용 요약
3.2. 성균관 유생 자치활동의 의의
3.3. 조선 시대 교육제도의 특징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조선시대 성균관교육 개요
조선시대 성균관은 역사 이래 최고의 학부기관이었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악정·직강·박사·학정·학록·학유 등의 관직을 두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나 음서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가 있었다. 유생은 국가로부터 학전과 외거노비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들은 문묘종사나 정부의 불교숭상 등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수업거부) 또는 공관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이자 관리 모집단이었던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2.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
성균관 유생들은 다양한 자치활동을 통해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용감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펼치며 여론을 형성하였다. 성균관에는 학생회장 격인 장의가 존재하였는데, 장의는 다른 유생들을 성균관에서 쫓아낼 수 있을 정도로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장의가 출타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수복들이 탕평비 앞의 향교변에 기다렸다가 맞아 절하고 모시고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으며, 동서재의 방색장들도 장의를 따라 행렬을 지어갔다. 이처럼 성균관 내에서 장의에게는 큰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유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면책이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선배 유생이 후배를 불러 강압적으로 구타하는 행위를 하였다. 또한 소행이라는 유소를 통해 유생들은 거리를 정비하고 상가들에게 문을 닫게 하는 등 여론을 형성하며 행진하였다. 이 때 장의와 소임들이 맨 앞에 서고 유생들이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유생들은 궐희라는 축제를 통해 권당이나 소행과 같은 집단행동을 연습하였다. 궐희에서는 공자를 왕으로 모시고 다른 4성을 봉국으로 하여 마치 제후와 천자의 관계처럼 상하재 유생들이 백관의 자리에 앉는 등 정치 학습의 장이 되었다. 이를 통해 유생들은 정치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신임 대사성이 부임하면 상견례를 통해 환영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립이라는 풍습을 통해 서열을 엄격히 지키며 학생들을 통제하였다. 음주 풍습도 있었는데, 망향대에서 향수를 풀거나 석채 후 동서 식당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균관 유생들은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자치기구를 통해 집단 행동을 펼치며 여론을 주도하였다. 장의라는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강력한 자치 활동이 이루어졌고, 유소나 권당, 거관과 같은 집단 행동을 통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지닌 중요한 역할과 지위를 보여준다.
1.3.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단순히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자치활동을 통해 불의에 항변하고 사회 참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성균관의 역할이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와 풍속, 그리고 교육 목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시대 교육제도의 특징과 의의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과거 교육이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2. 본론
2.1. 성균관 유생들의 문화와 풍속
2.1.1. 장의입반
선균관 장의(學生會長)가 출타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수복들이 탕평비 앞의 향교변에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 절하고 모시고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동 · 서재 방색장(代表)들도 지팡이를 짚고 앞길을 인도하였으며, 이 때 재직 7~8명이 무리지어 따랐다. 그리고 모두가 용모가 아름답고 깨끗하였다. 당대에 이렇다 할 벼슬이 없는 데도 전후에서 호위하는 일은 성균관에 장의가 들어올 때뿐이었으며, 이미 동재의 출입문에 들어...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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