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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근현대 시문학
1.1. 근대 시문학의 탄생
근대란 전세계적으로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계급의 구성과 문화양식도 변화하게 되는데, 이는 시문학 양식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구 시문학사의 발전과정에서 차례로 나타난 고전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리얼리즘 등의 문예사조는 근대라는 새로운 생활 질서를 갖게 된 시대의 시문학이 보여주는 단계적인 변화 과정을 의미한다. 한국의 근대 시문학도 이러한 세계사의 진행 과정 및 역사 발전과정과 대체로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조선조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봉건사회의 붕괴와 그 뒤를 이은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을 배경으로 한국의 근대 시문학은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한국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도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구 자본의 발전을 위한 식민지체제에 들어섬으로써 근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이 한국 근대 시사가 지닌 특수성을 낳았다. 동시에 이는 세계문학적인 보편성을 지닌 내용·형식적 발전을 이뤄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최초로 문학적 움직임이 집단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개화기였다. 개화기에 새롭게 대두된 사상적 조류는 사회진화론이었다. 당시 일부 지식인들은 이를 낙관적으로 해석하여 한국도 서구열강과 같은 정치·경제적 수준에 올라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개화가사, 창가들은 낭만적인 세계평등주의, 문명개화의 소망 등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반면 한일합방 시기까지 일제와 격렬한 언론투쟁 활동을 벌였던 대한매일신보 관련 지식인과 투고가들은 개화기 시조, 창가, 가사 등의 모든 개화기 문학 장르를 통하여 외세지향적인 국내 정치 엘리트들과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침탈에 대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화기 시문학 장르 중 개화기 시조·개화가사는 그 형태적 특성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 조선조 시문학 장르의 연장선에 속하는 것이었다. 창가라는 장르도 서양악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새로운 장르이긴 하나 문학적 성격보다는 실용·가창적 성격을 주생명으로 하는 장르였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유학을 통해 서구 시문학의 세계를 일부 접하고 돌아 온 최남선이 새롭게 시도한 신체시라는 양식은 우리 시사에서 근대적인 시문학 양식이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기능을 갖고 있던 장르였다. 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작품은 봉건 유제에 대한 격렬한 부정과 신세대 소년을 새시대의 유일한 담당층으로 제시하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시사적 자극을 시발로 해서 한국의 근대 시문학은 1910년대 이광수, 현상윤, 최소월 등 일본 유학생 시인들의 시 작품들을 거쳐 1910년대 말엽 본격적인 근대시로 개화하게 되는 것이다.
1.2. 개화기 시문학과 신체시
개화기의 문학은 1890년대 이후 성립된다. 그 내용에서 개화기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는 개화기 문학은 산문에서는 역사·전기 문학과 이른바 신소설류가 그 중심이 되고, 시가에서는 전통 시가의 형식을 계승한 개화 가사, 개화기 시조와, 외래 문화의 영향으로 새로 소개된 시형인 창가와 신체시가 그 중심을 이룬다.
개화 가사와 개화기 시조는 공통적으로 개화 의식에 대한 비판적 경계심이 그 중심 주제를 이루면서 작가도 봉건적 인물이거나 미상인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의 신흥 문물에 대한 찬양과 진취적인 기상을 드러내는 전문적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에 활발하게 설립된 각종 학교의 교가와 응원가, 그리고 기독교의 찬송가와 서양식의 행진곡 등의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대의 가사와 시조, 그리고 민요의 형식도 동시에 존재하고 그 어떤 하나의 형식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른바 자유시형을 지닌 시가도 다수 발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의 어떤 작품을 특정한 한 형식에 담아 두거나, 최초의 신체시 아니면 최초의 자유시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작품 이해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1910년대의 시는 1919년 일대 전환을 이룬다. 1919년 1월 김동인과 주요한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창조]는 최초의 근대 문예 동인지로서 자각적인 문학 활동으로서의 시와 소설을 다수 싣고 있으며, 1919년의 3.1 운동의 실패는 때마침 유행하던 세기말적 풍조와 맞물려 많은 지식인 시인으로 하여금 허무와 좌절을 읊조리게 하였던 것이다.
1.3. 1910년대 자유시 문학
1910년대 자유시 문학은 우리나라 근대시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자유시의 등장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1910년대 자유시는 우리나라 근대적 시 형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전까지 전통적인 가사, 시조 등의 양식에 국한되어 있던 시가는 이 시기 자유시의 출현으로 근대적 의미의 자유로운 시 형식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특히 김억의 "봄은 간다"와 주요한의 "불놀이"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들은 격조 높은 언어와 독창적인 시적 이미지를 보여주며 자유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한국 시문학의 발전에 있어 근대적 시 형식의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1910년대 자유시는 기존의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개인적 정서와 서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 독립 의식이 약화되면서 시인들은 점차 개인의 내면 세계와 감정 표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시가 개인의 예술 세계로 발전하는 데 일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구 문학의 영향으로 상징주의나 이미지즘 등의 새로운 시 기법들이 도입되면서 시어와 이미지의 미학적 차원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셋째, 1910년대 자유시는 근대 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최남선, 현상윤, 최승구, 이광수 등의 작품을 통해 자유로운 리듬과 개인적 서정, 그리고 현실 참여의 가능성 등이 제안되었다. 이는 이후 1920년대 시가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서구 시의 번역 소개를 통해 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종합하면, 1910년대 자유시는 한국 근대 시문학의 태동기로서 근대적 시 형식의 정립, 개인적 서정의 강조, 시의 미적 차원 강화 등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시의 성과는 이후 1920년대 이후 시문학의 발전에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 1920년대 시문학의 형성
3·1 운동의 실패는 지식인들 사이에 엄청난 좌절감을 가져왔고, 때마침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