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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 전쟁과 대한민국 개입 배경
1.1. 베트남 전쟁의 개요
베트남 전쟁은 총 3차에 걸쳐 전쟁이 진행되었다. 1차 베트남 전쟁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5월 7일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베트남 정부와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 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으며,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면서 프랑스군이 철군하였고 17도선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자유민주주의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2차 베트남 전쟁은 1964년 8월 2일부터 1973년 1월 27일까지 진행된 베트남 내전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0년에 결성되어 낮에는 마을 지하에 땅굴을 파서 숨어살고 밤에는 게릴라 활동을 하며 남베트남 즉 자유진영을 공산화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실시한 전쟁이었다. 여기에 미국과 대한민국이 참전하였다.
3차 베트남 전쟁은 1974년 12월 31일부터 1975년 4월 3일까지 진행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전면전 전쟁이었다. 남베트남 정규군과 민병대,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이 수적으로는 비슷하였지만, 장비면에서 남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특히 남베트남 공군력은 세계 4위 수준으로 강대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전면적인 공격에 남베트남은 4개월 만에 항복을 선언하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흡수통일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된 전쟁으로, 1차 전쟁은 프랑스와 베트남 정부 간의 전쟁, 2차 전쟁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내전, 3차 전쟁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전면전이었다. 특히 2차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이 참전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2. 2차 베트남 전쟁 발발 배경
남베트남은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고, 지엠정권의 족벌정치와 부정부태, 민족해방전선을 바탕으로 베트콩이 태동되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경우 군부쿠테타로 11회의 정권교체가 있었으며 이에 북베트남이 개입하여 정규군을 남파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더하여 64.8.2일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통킹만 결의안을 가결하여 베트만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3. 대한민국 베트남 전쟁 파병 배경
대한민국 베트남 전쟁 파병 배경은 국제정세와 국내적인 상황 및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국제정세 측면에서 살펴보면,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인도차이나 지역에 더 많은 깃발 정책(The More Flag Policy)을 폈고,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주변국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당시의 국제 정세상 소련의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사태, 중국의 1차 핵실험 성공,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채택 등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5·16 군사정변으로 출범한 군사정부의 정통성이 부족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국시가 반공이었던 만큼 베트남 파병을 통해 반공의식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도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을 경우 한반도에 주둔하던 미군이 베트남에 파병될 가능성이 존재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민국은 비록 베트남과의 군사협정이 맺어지지 않았고 SEATO(동남아시아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6.25전쟁 참전국 답례, 베트남 공산화 방지, 미국과의 유대강화를 통한 안보 달성 등의 명분을 만들어 베트남 전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1.4. 베트남전쟁 파병 결과
베트남전쟁 파병 결과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첫째, 한국군의 파병은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 부대로서 자유 수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투사하였다. 둘째, 파병을 통해 국방력이 강화되고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파병과정에서 2만 4천여명의 민간기술자가 베트남에 파견되었고, 이 중 2/3가 외국기업에 취업하는 등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으로는 첫째, 참전용사에 대한 보상이 미흡하였고, 베트남 현지 민간인 학살 등의 사건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둘째, 라이따이한이라 불리는 적대국 군인의 자식에 대한 차별이 발생하였다. 셋째, 월남전 당시 미국 청문회에서 한국군이 미국의 돈을 노린 용병군이라고 명시되면서 한국군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넷째, 월남전에 반대하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론적으로 베트남전쟁 파병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전쟁 자체에 대한 정당성 논란과 참전 과정에서의 부작용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5. 결론
베트남 전쟁은 한국의 안보관과 경제기틀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