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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에게배울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류자명의 의열투쟁과 아나키즘
1.1. 아나키즘 수용과 의열단 활동
1.2.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1.3. 민족전선론 제창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4. 참고문헌
2.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김원봉
2.1. 유소년기의 김원봉
2.2. 의열단 조직과 활동
2.3. 중국에서의 조직적인 투쟁과 활동
2.4. 조선의용대
2.4.1. 조선의용대 창설과 활동
2.4.2. 조선의용대 단원과 동지들
2.5. 해방 전후의 활동과 행적
2.6. 평가와 해석
2.7. 참고문헌
3. 의열단의 활동과 아나키즘
3.1. 김원봉과 의열단
3.1.1. 김원봉
3.1.2. 의열단 창단과 특질
3.1.3. 의열단의 활동수단과 주요 활동
3.1.4. 의열단의 이념
3.2. 아나키즘
3.2.1. 아나키즘의 의의
3.2.2. 아나키즘의 수용
3.2.3. 의열단의 아나키즘
3.3. 의열단의 의의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류자명의 의열투쟁과 아나키즘
1.1. 아나키즘 수용과 의열단 활동
류자명은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 중 가장 먼저 아나키즘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신념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가 신봉한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념 중 하나였다.
류자명은 1919년 6월 조용주와 함께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충청도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여운형의 소개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고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류자명은 단재 신채호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 받아, 이후 신채호를 존경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김한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서점인 나카야마서점에서 "개조", "해방", "비평" 등 잡지를 구독하며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1919년 12월 류자명은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서울로 귀국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 있는 일본 서점에서 "개조", "해방" 등 잡지를 읽으며 연구하였다.
류자명이 아나키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모리토 다쓰오와 오스기 사카에 때문이었다. 모리토 다쓰오는 1920년 1월 아나키스트 경제학설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구속되었고, 오스기 사카에는 일본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번역가로 공개적으로 아나키스트임을 선포하여 체포되었다. 그 영향을 받아 오스기 사카에와 크로포트킨의 저술을 탐독하고 점차 아나키즘을 수용해나간다.
류자명이 공산주의보다 아나키즘에 대해 더 경도된 이유는 아나키즘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아나키즘에서 주장하는 국가권력 반대를 일제 식민지권력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하고,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암살과 파괴의 수단을 반일애국운동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존경쟁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1921년 류자명은 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아나키즘 성향의 글을 기고했다. 1921년 3월 사상범으로 류자명이 체포되었으나 수원농림학교 동창의 형이었던 김태석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4월 그는 서울을 떠나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천진에서 그는 김원봉과 역사적 만남을 가졌다. 1920년대 초 중국에서는 의열단을 중심으로 의열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922년 류자명이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거기에서 통신연락과 선전작업을 맡았다.
1.2.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1920년대 중국에 체류하던 류자명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소재한 입달학원을 근거지로 삼아 한·중 공동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부터 이 학원에서 농업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던 류자명은 아나키스트들의 집결지가 된 입달학원을 통해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 선전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이 무렵 항일협력을 위해 중국인과 일본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모여들면서 상해 프랑스 조계 내 화광병원 또한 류자명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검거를 피해 상해를 떠난 류기석이 입달학원을 찾아 류자명을 만나면서, 1930년 4월 무렵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화연맹)이 결성되었다. 남화연맹은 1931년 3월 1일 "3·1절 기념선언"을 발표하고, 5월 1일에는 일반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격문을 발행하는 등 활발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남화연맹은 조직 강화에 착수하여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설치하고 선전활동을 강화하였다.
류자명은 연맹 전체회의에서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되었다. 남화연맹은 강령과 규약, 선언문을 통해 기존의 정치운동 및 제도를 부정하고, 무정부공산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고, 여기에도 류자명이 참여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은 적의 기관 파괴와 적의 요인 암살을 주요 활동 목표로 삼았는데, 류자명은 1933년 일본공사 아리요시 암살계획과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파 등에 관여하였다.
류자명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공도인쇄소를 설립하고 자유지를 발행하는 등 아나키즘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자유가 발행 정지되면서 항일구국연맹의 활동이 침체되자 류자명은 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처럼 류자명은 입달학원을 거점으로 한·중 연대의 중심에 있었으며, 남화연맹과 항일구국연맹 등 아나키스트 단체의 주도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아나키즘의 혁명적 수단을 통해 민족해방과 사회개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1.3. 민족전선론 제창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류자명은 1930년대 초반 재중 한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주도한 민족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재중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1937년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선혁명자연맹으로 개조하였다. 조선혁명자연맹은 류자명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조선민족혁명당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1937년 7월 중국 국민당 정부는 김구·김원봉·류자명 등을 여산에 초청하여 중한합작에 의한 항일연합전선 전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후 류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의 대표자격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의 김성숙 등과 남경 시내에서 매주 만나 민족전성 결성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7년 7월 말 무렵 간담회에서 조선민족전선통일촉성회를 성립시키고 통일운동에 진력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며칠 뒤 남경한족회 전체대회로 재중국조선민족항일동맹이 발기·조직되자 이 동맹과 통일촉성회를 합동해서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였다. 이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의 결합을 추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조선혁명자연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3단체의 대표대회를 거친 뒤, 1937년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이하 민족전선)을 결성하고, 명칭·규약·강령 및 선언 등을 통과시켰다.
민족전선의 주요 공작방침으로 "조선 국내와 국외의 민족통일전선을 촉진할 것", "광범한 통일적 중한민족연합전선을 건립할 것", "전 민족을 발동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중국의 항일 전선에 참가할 것" 등을 정하였다. 민족전선의 조직체계는 김원봉이 자금 지도를 맡고 선전부와 정치부 및 경제부를 두었으며, 류자명은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류자명은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의 주필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전선의 필요성과 중국과의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 제 1·2·3지대 대원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이 활동하던 화북으로 이동하였고, 이로써 조선의용대의 조직체계는 이분화 되어 김원봉의 지휘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류자명은 모든 민족 세력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전선과 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두 단체 간의 통일을 둘러싸고 논의가 진행되자 류자명은 윤세주와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로 논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통합방식을 두고 양 진영 간 의견차이가 현격하여 통일회의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1942년 민족전선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그해 10월 류자명은 유림과 함께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류자명은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와 중경의 독립운동 세력이 해결할 당면 현안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전 마지막으로 열린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류자명의 이름이 나온 뒤로는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1.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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