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 사진사와 미학 2차 과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사진의 역사
1.1. 사진의 국내유입
1.2. 중국을 통한 사진과의 접촉
1.3.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
1.4. 1900년대의 영업사진 시작
1.5.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사진과 신설
1.6. 1920년대의 사진(예술사진의 태동기와 경성사진사협회)
1.7. 30년대 아마추어 사진가의 등장과 '예술사진' 개념의 확장
1.8. 8,15해방과 사단의 재현성
1.9. 리얼리즘 사진
1.10. 1960, 70, 80년대의 사진의 흐름
1.11. 90년부터 현대까지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국사진의 역사
1.1. 사진의 국내유입
중국과 일본에 전래된 사진은 우리나라에 오면 국내사정으로 수용의 길이 막혔다. 1840년대의 국내는 폐쇄정책을 실시해 외국과의 교섭을 차단하고 천주교를 박해했으며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의 유입을 금지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주위 국가에 있던 사진은 국내로의 이입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로 놓여졌다. 계속되는 서양의 자본주의 세력들의 통상과 개항의 요구는 프랑스와 미국의 전쟁 형태의 싸움으로 까지 이어졌고 그 후로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쇄국으로 인한 암흑기가 장기화 되었으나 중국과의 문호는 개방되어 있었다. 매년 공식사절단이 베이징을 왕래했으며, 서양문물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 또한 사절단과 역관의 관심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카메라를 포함한 촬영기재를 구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을 익히는데 어려움이 있어 수용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에 이미 전파된 사진술은 사절단에 의해 사진에 관한 정보 형태로 된 것만 이입되는 특이한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1880년대 초반 개화파 지식인들 사이에 서서히 확산 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2. 중국을 통한 사진과의 접촉
1860년대 쇄국시대에 유일하게 교류하던 나라는 중국의 청나라 뿐이었다. 매년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1863년 이의익을 정사로 하는 '진하 겸 동지사은사'라는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이의익을 정사로 하는 이들 사절단이 바로 최초로 사진관을 찾은 사람들이며, 외국인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 자료는 이의익의 여행기이자 보고서인 '연행초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 자료에 따르면 촬영장의 구조는 오전 8시반~11시에만 가능하고 맑은날에만 촬영이 가능했다. 당시의 카메라는 캡 셔터를 사용하는 습식 감광판 사용 카메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의익이 러시아 사진관에 가서 했던 촬영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촬영이었고 포토그라피를 사진이란 용어로 처음 부른 것도 이들이 처음이었다. 사진이란 용어가 일본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해 왔던 막연한 판단이 이로 볼 때 잘못된 것이며, 사진이란 용어가 1863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모진 또는 모진지법, 즉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다는 뜻으로 부르다가 다음날 사진을 처음 찍을 때부터 사진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99년 '최인진' 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이 쓴 ' 한국사진사'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그 후, 1862년 10월, 오경석은 역관으로 이의익을 정사로 한 진하 겸 동지사은사를 수행해 중국 사행길에 오르며 아라사관에서 사진을 처음 목격 후 10년 동안 사행길을 다니며 1872년 청나라에서 프랑스 외교관 매휘립이 찍은 자신의 초상사진을 가지고 귀국해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역관, 해외시찰 등을 통해서 사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은 한국 사진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종은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국력 제고를 위해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880년대 초반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된 고종의 사진에서는 경직된 모습이지만 다소 편안한 표정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등극한 이후 촬영된 사진들은 대부분 신식 군복 차림에 경직된 자세로 일관되었다. 이는 의궤도감에 기록된 고종의 초상화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의궤도감의 초상화는 제례적이고 기념적인 성격을 띠고 제작된 것이었지만, 사진의 경우에는 지배자의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유포라기보다는 외세에 대한 항의식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헤이그 사건으로 인해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을 게시하려는 '어진봉안운동'이 각 단체별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는 이미 대중들 사이에서 고종의 초상사진이 널리 알려져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사진이 재세 당시 또는 생전에 촬영되어야 한다는 매체적 특성으로 인해 초상화와는 다른 차이점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특성이 반영된 독특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1.4. 1900년대의 영업사진 시작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의 한국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인들이 한국에 사진관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중 서화가 해강 김규진은 1907년 8월 17일 서울 석정동...
참고 자료
이경률, 「한국 최초의 사진에 관한 실증적 고찰」, (비교문화연구 제 56집, 2019.9, p281~314)
김상미, 「한국전쟁기 한국사진가의 사진사적 위상」,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27집, 2010년, p435~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