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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전쟁영화의 역사와 발전
1.1. 해방 이후 한국 전쟁영화의 출현과 발전
해방 이후 한국 전쟁영화의 출현과 발전은 다음과 같다.
광복 직후 한국영화계는 새로운 질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계 자체의 동력보다는 정치, 사회적 동향이 영화계를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1945년 일제의 영화시설과 기자재를 인수한 조선영화협회가 발족하였고, 이어 1946년 좌익계의 조선영화동맹과 민족영화건설협의회가 결성되어 한국영화의 새로운 질서 형성과 함께 혼란이 예견되었다. 미군정청이 공포한 영화 관련 법령들은 새로운 영화법령으로 영화계의 활동을 제재하였고, 이에 따른 배급과 흥행계통의 혼란은 한국영화의 미래를 양적팽창에 그치게 만들었다.
이 시기 광복 영화들은 애국투사, 순교자, 의사의 전기와 투쟁사를 통해 민족해방을 위한 겨레의 아픔과 수난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영화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영화인의 납북과 월북, 기자재 파괴, 기존 필름의 유실 등이 그것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민간영화 제작이 어려웠고, 군영화 제작 활동에 투입되었다. 전시 중 한국영화는 일반극영화보다 기록영화 제작에 힘썼다.
1954년 서울이 환도되면서 한국영화 제작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전후방의 시국적 계몽영화와 전쟁을 배경으로 한 범죄 서스펜스물이 주류를 이루었고, 기록영화의 활성화가 동란기 한국영화의 특징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는 1950년대 후반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부의 면세조치와 극장 증가로 인해 양적 성장을 이루었고, 예술적으로도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
1.2. 1950년대 한국 전쟁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는 한국 전쟁영화의 황금기로 볼 수 있다.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전후 영화계의 인기 소재가 되면서 특히 이 시기에 많은 전쟁영화들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반공을 주제로 한 전쟁영화들은 6·25전쟁의 처참함에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년)과 <피아골>(1955년)은 전쟁영화의 수작으로 꼽힌다.
<아리랑>은 나운규 원작을 6·25전쟁 상황으로 시대배경을 바꿔 미군을 숨겨준 이유로 좌익의 박해를 받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성격파 배우 허장강의 데뷔작으로 당시 인기를 모았다. 한국영화 베스트에 항상 선정되는 명작 <피아골>은 우리영화사상 처음으로 지리산 빨치산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이념적 광신과 인간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빨치산 게릴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1955년 백호영화제작소에서 제작된 <피아골>은 당시 국방부 영화제작 현상모집에서 당선되어 상금 300만환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6·25전쟁 당시의 생생한 전투 장면과 병사들의 전우애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당시 서울에서만 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제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50년대에는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년)와 이만홍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등 다수의 전쟁영화가 제작되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빨간 마후라>는 공군 조종사의 투혼과 전우애를 다루어 2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도 여러 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을 안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또한 전쟁의 참혹함과 병사들의 전우애를 잘 그려내며 당시 한국 전쟁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1950년대는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여운 속에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의 전쟁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한국영화사상 특기할 만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1.3. 1960년대 이후 한국 전쟁영화의 변화와 정체
1960년대 이후 한국 전쟁영화의 변화와 정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제작된 영화 '5인의 해병'(1962, 김기덕 감독)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1960년대 전쟁영화의 붐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