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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상의 역사
1.1.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육상경기가 신전 앞에서 행하는 의식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기원전 776년에 올림피아 지방에서 발전했던 「올림피아스(Olympias)」라는 경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미 이 경기에는 직선 단거리 경주의 일종인 「스타디엄주」, 장거리 경기인 「도리코스주」, 「고대 오종경기」 및 「원반던지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에서 육상경기는 오래전부터 발전을 거듭해왔다. 특히 이 경기들은 신전 앞에서 행해지는 의식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스포츠가 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전 앞에서 펼쳐진 이러한 육상경기는 1000년 동안 융성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기원 393년 그리스도 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금지되었다. 이후 올림피아 성역이 붕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이나 농민들 사이에서 스포츠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위정자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의지의 표현 수단으로서 경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육상경기는 신전 앞의 의식적인 행사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히게 되었다.""
1.2. 근대 육상, 영국에서 발전 시작
17세기에 이르러 육상경기는 대부분 상금을 걸고 진행되었으며, 상금을 타기위한 수단으로 각지의 우수 선수들을 고용하려 애쓰는 귀족들에 의해 규모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보였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된 신문은 각종 경기의 기록, 경기 예고 및 예상기사를 실어 대중에게 경기의 재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각종 레이스 경기는 별도의 시설없이 공공도로를 사용한 장거리 레이스로 각지에서 행해졌으나, 이후 경기 전체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정해진 경기장을 주회(走回)하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장거리뿐 아니라 1마일, 1/4마일, 100야드 등 비교적 짧은 거리의 레이스도 발전하게 되었다.
1.3. 1830년 아마추어 경기 등장
1830년 들어서면 주목해야 할 레이스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영국 버밍검 대학생이 프로와 같은 경기용 가명(假名)을 내걸고 프로와 같은 외관을 갖추고 1마일 크로스 컨트리 장애물 레이스를 달린 것이다. 이것은 상금을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자신의 학교가 아닌 공공도로를 달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아마추어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사건은 상금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레이스와는 달리 자신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공공도로를 달리는 새로운 아마추어 레이스의 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1840년대에 육상경기의 무대는 대학으로 옮겨지게 되며, 아마추어 경기가 더욱 발전하게 된다.
1.4. 미국이 주도하는 20세기 육상
미국이 주도하는 20세기 육상이다.
20세기 육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육상경기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선수들에 의해 태동되었다. 그 종목도 단순히 육상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체조 등 체력 양성에 효과적인 다른 스포츠와 병행하며 발전을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육상경기 클럽은 「샌프란시스코 올림픽클럽」으로, 아마추어가 관리한 경기 클럽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1868년에 이르러「전미 아마추어 육상경기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최초의 실외 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대학의 육상경기는 풋볼 등에 비해 다소 늦게 발족되었다. 1873년 하버드, 예일, 코넬, 콜럼비아 등 4개 대학 대항 육상경기가 개최되어 100야드 달리기, 120야드 허들, 1마일 달리기, 3마일 달리기, 7마일 경보 등의 종목을 통해 실력을 겨루었으며, 이후에 14개 대학이 모여 「전미 학생아마추어 육상경기협회」를 조직함으로써 본격적인 학생 육상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20년이라는 단기간에 영국을 앞질렀으며 기록이나 전적면에서 세계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은 「전미 아마추어경기연합(AAU:Amateur Athletic Union of United States)」을 설립하고 영국의 각종 경기 협회와 대서양을 넘나드는 대학간 교류를 시작했다. 20세기를 목전에 둔 이 시기에 양국이 서로 원정하면서 육상경기의 대항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그후 「근대 올림픽」이 해가 지날수록 규모를 확대하고 내용의 충실을 다져가며 더욱 성대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 주 종목인 육상경기가 세계적으로 보급되는 추진력이 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필드경기
2.1. 도약경기
2.1.1. 높이뛰기
2.1.1.1. 유래와 역사
높이뛰기의 유래와 역사는 다음과 같다.
높이뛰기가 언제부터 경기의 한 종목으로 실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문헌 기록상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64년 근대 육상 경기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대학의 육상 대항 경기 중 1m65를 넘은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1866년에는 캠브리지 대학생 2명이 1m75를 넘어 최초의 영국선수권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의 도약 방법은 선수가 가로대 양쪽을 감싸 안는 껴안은 스타일(tucked style)로, 멀리뛰기처럼 가로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매우 비효율적인 공중동작이었다. 이후 높이뛰기의 기술은 보다 효과적인 '가로대 넘기'를 중심으로 개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높이뛰기는 미국으로 전파되어 널리 행해졌다. 1876년에는 미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의 종목이 되었으며, 이 대회에서 휘켄이 1m65로 미국 최초의 높이뛰기 선수권 보유자가 되었다. 1895년에는 마이크 스위니가 가위뛰기를 개량한 '이스턴 컷 오프' 방법을 사용하여 1m97이라는 대 기록을 수립하였다.
1912년 호라인은 '롤 오버'라는 새로운 도약법을 사용하여 17년간 유지되던 스웨니의 기록을 깨고 인류 최초로 2m를 넘는 선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엉덩이 높이보다 머리를 밑으로 내려 바를 클리어하면 안 된다'는 규정, 즉 '다이빙 스타일'을 금지하고 있어 효과적인 공중 동작인데도 파울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 1933년 현재와 같이 '경기자는 한쪽 발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간단한 규정으로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스트래들(다리벌려뛰기)을 이용하여 1941년 스티어즈가 2m11로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면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그 이전의 도약법과 다른 스타일로 체조나 수영의 다이빙에서 뒤 돌아서서 공중 회전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고안한 배면뛰기를 이용하여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포스베리가 2m24의 올림픽 신 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하였다. 1970년대에는 배면뛰기와 다리벌려뛰기 중 어떤 도약 동작이 우수한 것인지에 대해 크게 논의가 있었는데, 1978년 구 소련의 야시첸코가 다리벌려뛰기로 2m34까지 세계신기록을 갱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배면뛰기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2.1.1.2. 높이뛰기의 기능
높이뛰기의 기능은 도움닫기, 발구르기, 공중동작, 그리고 착지로 구분된다. 도움닫기는 힘차고 탄력 있게 달리는 것이 필요하며, 발구르기는 도움닫기에서 얻은 속도를 높이 뛰어오르는 힘으로 변환하는 동작이다. 공중동작에서는 가로대를 등지고 넘는 배면뛰기가 주로 사용되며, 착지는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부상 예방에 중요하다.
특히 도움닫기와 발구르기는 높이뛰기 성적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