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아르헨티나 페론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아르헨티나 현대사와 페론주의
1.1. 서론
1.2. 아르헨티나 시대적 배경
1.3. 군부 독재와 전쟁
1.4. 페론주의와 발생과 페로니즘
1.5. 페론의 집권
1.6. 결론
2. 아르헨티나 민중주의와 에바페론
2.1. 아르헨티나 약사
2.2. 에바페론에 대하여
2.3. 페미니스트가 바라보는 에바페론
2.4. 페론과 포퓰리즘
2.5. 아르헨티나 위기(2001년)
3. 포퓰리즘의 사례 - 페론주의와 차베스주의
3.1. 페론주의
3.1.1. 개요
3.1.2. 배경 및 내용
3.1.3. 페론주의의 진행
3.2. 차베스주의
3.2.1. 개요
3.2.2. 배경 및 내용
3.2.3. 차베스주의의 진행
3.3. 결론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아르헨티나 현대사와 페론주의
1.1. 서론
19세기말 유럽에서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식량 수입수요도 급증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식량수출도 크게 늘었으며, 1877년부터는 냉동육 수출까지 가능해지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고도성장의 가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7%를 오르내리면서 세게7대 경제부국으로 떠올랐다. 1인당 GNP는 스위스나 스웨덴보다 높았고 독일과 비슷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혜택은 거의 대부분 대 농장주와 대 상인 그리고 대 기업주에게 돌아갔다. 이민의 급증으로 임금이 오리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호황을 기록하고 있었던 반면,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경제마저 여의치 않았던 것이 아르헨티나 이민을 급증시켰었다. 어떻든 아르헨티나 경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보이고 있었으나, 일반 국민들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사회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1.2. 아르헨티나 시대적 배경
177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신생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수도로 승격되고 유럽의 지식과 사상이 유입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1816년 투쿠만에서 열린 의회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기반을 확실히 다졌고, 이어서 1835년에는 나머지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의 독재는 1852년에 끝났다. 1853년 제헌회의가 산타페에서 열렸고,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처음에는 다른 주와의 통합을 거부했으나, 1860년 다른 주들의 무력사용에 패하여 통합을 받아들였다. 외국 자본과 기술의 원조로 철도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철조망, 개량종인 소와 양, 냉동기술 등도 도입되었고, 유럽에 낙농제품을 대규모로 수출하게 되었다.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늘어난 정부수입은 이주민의 유입을 육성하고 공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80년에 들어와서 에스탄시에로로 불리는 대농장주들이 핵심을 이룬 보수적인 과두정치시대가 열렸다. 이 체제는 1916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온건 정부로 계승되었으나 1930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유지되던 민정은 사실상 끝이 났다. 불안한 정국은 10년간 계속되다 1940년대 초 후안 페론이 카리스마적인 민중지도자로 떠오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1.3. 군부 독재와 전쟁
1976년 3월 24일 육군 사령관 비델라(Jorge Rafael Videla)장군은 카톨릭 교회의 암묵적인 지원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델라는 아고스티(Ramon Agosti) 공군 사령관, 마세라(Eduardo Emilio Massera) 해군사령관과 함께 군사 평의회(Junta Militar)을 구성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 정당, 노동조합 활동을 중지시켰으며,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전개하여 페론주의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등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78년 6월 2일 제 11회 월드컵 대회가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인권탄압에 항의하여 네델란드 등 서방국가들은 불참을 고려하였고,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직위원장 악티스(Omar Actis) 장군이 살해되는 등 잡음이 일었다. 그러나 FIFA와 비델라 군사정권은 대회의 개최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아르헨티나는 대망의 결승전에서 주전 선수 크루이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한 네덜란드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했다.
1981년 비델라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비올라(Roberto Viola)장군은 야당과의 대화를 약속하는 등 민주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나 군부 강경파인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82년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6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5월 광장 어머니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의 활동으로 군사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자 갈티에리 정권은 3월 26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영국이 지배하던 말비나스 제도(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였다. 말비나스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범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려는 기도였다. 그러나 영국 수상 마가리트 대처의 단호한 대응으로 아르헨티나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대처 수상은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담이지만, 이 전쟁에서 영국을 지지한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바로 피노체트 정권의 칠레였다. 후일 대처 수상은 신병 치료차 영국을 방문한 피노체트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이 독재자를 지원함으로써 이 때의 빚을 갚았다.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 책임을 지고 갈티에리 대통령이 사임하고 동년 7월 1일 비뇨네(Reynaldo Bignone)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더 이상 군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비뇨네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1983년 10월 30일)에 앞서 두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피체포자와 실종자 관련 문서를 파괴하도록 비밀 명령을 내렸으며, 둘째 이른바 "국가 전복에 대항한 전쟁"(추악한 전쟁)에 참가한 모든 군인은 사면한다는 자기 사면법(self amnesty law)을 제정하였다.
1.4. 페론주의와 발생과 페로니즘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는 원래 페루 부왕청 관할 지역으로써 페루로 공급되는 곡물과 육류생산이 경제활동의 주류를 이루었다가, 영국이 아르헨티나로 진출하여 교역을 시작함으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지역은 국제교역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상이한 경제활동은 두 중심세력을 만들었는데, 항구중심세력과 내륙중심세력이 부딪치게 된다. 항구중심세력은 중앙집권파가 주 세력으로써 내륙과 장벽을 허물고 자유주의 경제체제국가건립을 희망하고 있었고 내륙 중심세력은 연방주의파가 세력을 쥐고서 항구국유화로 관세로 번 수입을 전 지역에 분할하며 지방 자치권을 고수하자는 의견을 내세우고 대립하였다. 결국 내륙세력이 승리를 거두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특수지역으로 지정되어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며 아르헨티나 공업화의 원동력이 된...
참고 자료
김영길, 『남미리포트 <170> 페로니즘의 실체는 무엇인가?』,프레시안북. 2006
김영길, 『거지가 된 백만장자』,프레시안북. 2006
김영길, 『아르헨티나 페로니즘의 실체와 포퓰리즘』,프레시안북. 2004
오승구, 『아르헨티나 모라토리엄 선언의 배경 및 전망』,seri.org 연구보고서 2001
곽재성, 『역사마주보기 아르헨티나와 페론주의』 2014
김원호, 권기수, , 『아르헨티나 사태의 배경과 전망』,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라틴아메리카>, 동명사, 2017
이상환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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