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송시열이 차례로 배향되므로써 모두 여덟 분을 모시게 되었으므로 팔현묘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4. ... 숭원서원은 송담 송남수, 우암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이 이곳 사원에서 강의한 적이 있을 만큼 대전지역 학문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현서원도 헐리면서 ... 기존의 숭현서원의 묘정비는 1667년(현종 8년)에 강당 앞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의 본문을 신흠이 지었으며, 추기를 송시열이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과연 한반도 내에 있는지 살펴보고, 서기 3~4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김부식이 조작해낸 것이라는 역사학계의 정설이 옳은가를 검증하며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았던 우암 ...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듯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 후생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말했으며,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린 노론 사관의 실체를 밝히며,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기 때
김원행은 우암송시열과 도암 이재에게 사사하였으며 율곡 이이로 올라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었고 아울러 정치적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가문 출신이라는 점은 홍대용이 전통적인 ... 그러나 그는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9년째이던 21세에 윤증의 문집을 읽고 윤증과 송시열의 노소분당에 관한 논쟁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이 문제에 대하여 송시열을 비판함으로써 ... 노론의 집안에서 태어나 노론계통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면서도 노론의 대부나 다름없던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홍대용이 가진 비판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암송시열의 초상이다.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검은색 건을 쓰고 창의를 걸치고 있다. ... 우암송시열 초상채제공 초상화(시복본)윤두서 자화상 위의 세 작품은 한국 초상화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윤두서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자화상 외에는 정확한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다. ... 인물 주변에는 송시열과 정조가 썼다는 글씨가 남아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한국 초상화에서는 특이하게 얼굴만 남아있는 초상으로 유명하다.
춘추대의의 미명 아래 효종은 북벌론을 주창했고, 우암송시열은 청에 대해 강경론을 펴며 효종과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시골의 글방선생이 동리 사람과 학동을 데려와 우암송시열의 유상에 절을 하고, 효종이 북벌 때 입으라고 하사한 담비가죽 옷을 어루만지며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줄줄 흘리”
『계녀서』는 17세기 성리학의 전통을 이은 대 학자이자 정치가, 사상가, 철학자였던 우암송시열이 그의 맏딸이 장성하여 권씨 가에 출가할 때 즈음하여 자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여성이 ... 송시열은 부모-자식, 부부지간에 이러한 관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 조선 양반가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 『우암선생계녀서』의 내용은 모두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우선 간단히 기술하면, 부모 섬기기, 남편 섬기기, 시부모 섬기기, 형제
우암송시열이 숙종 5년에 거제도로 귀향을 오게 되면서 머물렀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반곡 서원은 등록된 문화재는 아니다. ... 나라를 일으키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자의 힘이 필요했던 터, 유배를 왔지만 우암송시열 선생은 제자를 배출했고 그 뜻에 따라 거제 지역의 유교 문화 창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 있으며 근처의 문화재로는 영주 부석사가 있다. 3) 선정한 대표자원이 해당 유형의 타 자원과 비교해서 어떠한 경쟁력과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지 본인의 생각을 기술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송시열의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다. ... 우암은 여기서 퇴계 이황과 율곡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렀다고 한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다. ... 바위에 몽괘벽, 청초안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송시열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 팔괘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은 살필 수 없었고 일부분은 대청마루로 되어있었다.
이 서원은 1634년에 창건되어 1660년에 사액을 받았고, 김장생을 주향으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송시열 선생을 함께 추배하고 있다. ... 돈암서원은 1634년에 창건되어 1660년에 사액을 받았고, 김장생을 주향으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송시열 선생을 함께 추배하고 있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 본 발제문에서는 조선중기에 등장한 사림의 성장기반과 특징을 알아보며, 대표적인 사림의 인물인 송시열과 이황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송환기가 매개가 되어 우암학의 계승자로 나선 정국채는 『송자대전』과 송시열의 「연보」를 숙독하는 한편, 주변의 동문들에게 우암의 저술을 필독 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 또한 송환기의 5대조인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국면으로 이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 송시열 이상으로 『주자대전』을 예찬하곤 했던 정국채는 성주에 건립된 노강서원의 사액 문제에도 큰 관심을 표했는데, 이 또한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노론계의 도통 계보를 중시한
호 : 우암, 우재.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비판 .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의리 내세움. ... 아들인 김집, 제자인 송시열, 송준길 함께 배향. ...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로 정한 것을 비판 - 송시열 - 효종의 사망에 따른 자의대비 복상문제에 대해 기년설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