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성리학자 송준길의 호이자 그의 고택의 별채건물 이름) 송준길은 한살 많은 우암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쌍벽으로써 두 사람 모두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 우암송시열이 직접 써준 ‘同春堂’현판이 걸려있는 동춘당은 반가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사랑채의 건물의 연장선에 있는 별당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5량집이다. ... 그 외 동춘당이 지어 진후에 사계 김장생 아래에서 같이 배워 송시열, 송준길과 동학이면서 같은 계열의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던 송애당 김경여가 이 둘과 모습이 비슷한 송애당을 건립하였고
저자의 주장이 팩트로 인정되지만, 사실 지금 와서 우암이든 백호든 누가 북벌론을 실행하려 했는가가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또한 북벌론은 윤휴가 아니라 노론의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으로 바꿔치기가 시도되고, 300년이 지난 지금 국사 교과서에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는 사라지고 대신 송시열의 이름이 올라 있게 ... 중용에 자신의 주석을 붙인 중용설, 즉 중용신주로 인해 송시열 등으로부터 주자의 논의와는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배척받는 계기가 된다.
은진송씨는 15세기 이후 활발하게 진출하여 17세기 이후 송시열과 송준길 등과 같은 정치사상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을 배출하였다. ... 따라서 은진송씨가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번성하여 제월당파, 사우당파, 동춘당파, 우암공파등 37개의 파로 확대되었다.
송병선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자는 화옥(華玉)이요, 호는 연재(淵齋)라 하였다. ... 송시열의 9대 후손인 송병선 선생을 기리는 문충사로 가게 되었다. ... (尤庵) 송시열(宋時烈) 5현(賢)의 서적에서 그 요령(要領)을 발췌해 근사속록(近思續錄)을 간행· 유포하였다.
이 작품을 화제로 김수증과 정선이 '고산구곡도'를 그렸는데, 전자에는 우암송시열의 한역시가 5언4구로 1곡에서 9곡까지 있고, 후자에는 우암, 김수항, 송도원, 정중순, 이자삼, ... 율곡 이후 17세기 송시열을 비롯한 주자학적 지식있다. 해주의 석담은 율곡 선생의 셋째 부인의 고향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송시열이 쓴 것이다. ...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 ... (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수성동 671-2 4 연 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15년(1688) 2월 제주도로 유배(流配) ... 주변현황 이 비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유적비로서 정주시 중앙 도로 변에 인접하여 학생들이 쉽게 역사와 문화재를 이해하는 좋은 장소로서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을 하는 곳이며, 인접한
. ● ‘서인’을 이끈 영수는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 윤증 : ‘송시열’의 제자 송시열, 윤증 즉, 이 선생과 자제를 보면서 조선 후기로 가는 것임. ● 윤증 : 실제 송시열의 ... 윤증의 아버지가 윤증을 잘나가는 친구인 송시열의 문하로 넣은 것임.) ● 친구의 아들이기 때문에 송시열은 15년 동안 열심히 윤증을 가르침. 15년이 흘렀을 즈음 송시열이 15년 동안 ... 그리고 송시열이 왜 ‘조선의 제 1의 학자’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송시열의 학문 중 틀린 것도 수두룩하다고 말하면법’)
저서로는 이 있다. (2) 우암송시열 : 조선후기의 성리학자자이며 주자학의 대가로 ,, 등 많은 양의 책을 써서 학문적 사상을 담았다. ... 특히 송준길, 송시열, 송규렴을 배출하며 가문을 조선의 명문가 반열에 놓이게 하였다. (2) 동춘당가의 진장 : 송준길은 17세기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체'라는 서체를 확립하였을 만큼 ... 당, 각종 계 등을 통하여 향촌 교육 활동을 하였고, 향안과 향약의 제정과 운영을 통하여 사림이 주도하는 향촌질서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6) 선비가의 학문과 교류 : 송준길과 송시열은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암송시열도 승자의 위치에 있던 자였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송시열이라 하면 북벌론을 펼친 사람이자 당파당쟁의 중심자였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 사실 송시열은 북벌론의 포기를 종용하라고 효종에게 비밀 상소를 했으며, ‘군주는 반성하며 공부하고 신민들을 햇볕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두려워하라’고 권했다.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계 호서학통을 계승하면서 주자학의 정통을 수호하는 일을 자임했던 인물이다. ... 그는 송시열의 제자인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인물성동이론과 여타 이기, 심성 등의 주제에 대해 외암(巍巖) 이간(李柬)과 논변을 펼쳤고, 이 논쟁은 생전에 ... 이러한 모든 내용 해석이 결국은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우암과 수암, 그리고 율곡의 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예학의 계보를 살펴보면 구봉송익필 - 사계 김장생 - 아들 김집 - 동춘당 송준길, 우암송시열로 이어진다. ... 그래서 효종이 도달한 결론은 우암송시열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국의 보수적인 유림, 양반층의 협조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따라서 송시열의 협조 없이 북벌의 추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효종은 수차례의 유청 끝에 송시열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문루의 편액은 우암송시열 선생의 글씨라고 했다.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송시열이 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 6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우암송시열은 직령의를 입은 후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밤 한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다. ... 인물 소개 1)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 송시열과 허목 (사대부의 나라) ◎ 목 차 1. 시대적 배경 2. 인물 소개 - 송시열과 허목 3. 사건, 주장, 활동 4. 인식과 평가 5.
사림정치론의 재검토, 전남사학, 2008 최창렬, 17세기 조선의 붕당정치에 관한 연구, 인문사회논총, 2006 이석린, 우암송시열과 붕당정치, 중원문화논총, 2006 박현모, 한국의 ... 이석린 역시 붕당정치론의 개념에 대한 동의 하에 송시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