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반정
- 최초 등록일
- 2008.04.02
- 최종 저작일
- 2007.03
- 1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광해군의 즉위에 따른 정치적 배경,
그의 개혁과정...
그리고 인조반정...
목차
Ⅰ서론
Ⅱ본론
ⅰ인조반정, 반정인가 찬탈인가
ⅱ왜란 중의 광해군
ⅲ즉위 후 광해군의 내치
ⅳ광해군의 외교정책
ⅴ광해군 재평가의 이유
Ⅲ결론
본문내용
Ⅰ서론
500년 역사의 조선 왕조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쫓겨나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왕이 3명있다. 어린 나이에 즉위 했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겨났던 노산군(단종), 포학하고 방탕했다는 이유로 중종반정을 만나 쫓겨났던 연산군, 그리고 이 글에서 논증해보고자 하는 인조반정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철저하게 외면당한 광해군은 조선 후기의 역사책이나 개인 문집에서 ‘혼군’이나 ‘폐주’라 불리어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과연 그는 문제가 많은, 어리석은 군주였을까?
17세기 조선은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만큼, 큰 위기를 맞게 된다.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으로 인해 나라는 피폐해졌고 민심은 흉흉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붕당의 조짐으로 어지러웠고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는 형국이었다. 밖으로는 명이 쇠퇴해가고 북방에서 여진의 후금이 강성해지며 국제 관계 또한 급변해갔다. 이시기의 군주가 바로 광해군이다. 그는 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져버린 국가의 기반을 재건해야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개혁정책을 펼치려 하였고 왕권강화를 단행해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그리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 오늘날 ‘양면외교’, ‘실리외교’라 일컬어지는 명과 후금사이의 외교 정책으로 조선사회의 안정을 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1623년 서인등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인해 역사의 혼군으로 격하되며 패배자가 되고 만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있다. 반정(反正)은 『춘추』공양전이나 『사기』고조기 등에 보이는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따라서 ‘반정’은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말한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했던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일으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라고 극찬하고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고 평하였다.
참고 자료
한명기. 『현명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2000. 역사비평사.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광해군 다시보기」.『역사비평 44호』. 1998. 역사비평사
이희근. 「쿠데타로 들어선 고립화의 길」.『주제로 보는 한국사』. 2005. 고즈윈
이이화. 「국가재건과 청의 침입」.『한국사 이야기12』. 2000.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