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해석(그는 성군인가 폭군인가)
- 최초 등록일
- 2019.12.10
- 최종 저작일
-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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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해석(그는 성군인가 폭군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성군이냐 폭군이냐, 광해군의 재평가
2. 본론. 일대기와 역사적 사실
1)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
2) 세 나라 간의 중립 외교
3) 일본과의 문화 교류
4) 대동법의 첫 도입
5) 인조반정과 그 후
3. 결론. 이상과 현실의 갈등
본문내용
1. 서론 – 성군이냐 폭군이냐, 광해군의 재평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틀어 연산군과 같이 “군”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된 왕이기도 하다. 조선 15대 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중립외교 및 부분적인 대동법을 실시하여 나라의 안정을 찾는 긍정적 평가가 보이는 반면, 조선 시대의 왕 중에서 가장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여 막대한 세금징수와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비윤리적 행동으로 비판적인 평가도 보인다. 후에는 붕당들의 신경전으로 인하여 반정을 당하고 폐위를 당하고 붕당들에게 왜곡되어 기록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점차 재평가가 되어 지금도 몇몇 학자들은 “광종”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견이 나뉘는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광해군을 평가해 보았다.
2. 본론
2 – 1.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
선조가 집권할 때, 명나라를 침략하는 빌미로 조선을 공격하는 壬辰倭亂(1592)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의 인사권 다툼으로 인해 붕당이 만들어졌고 의견 대립이 심하여 나라의 상황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붕당은 성리학을 추구하였고 이로 인해 나라의 상태가 악화되자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고 나름 군대를 양성을 하였지만 일본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한 군사력으로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 군대 체계상(制勝方略 : 도 단위의 군사체계, 제승방략이 무너지면 그 도는 완전 점령.) 초반에 일본이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유능한 광해군을 책봉하였고 광해군 역시 나라의 회복에 적극 힘썼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포함한 많은 세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조정에서 좋은 평가를 보지 못해서 광해군을 책봉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