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와 주화파로 보는 병자호란
- 최초 등록일
- 2022.05.03
- 최종 저작일
- 2016.06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들어가며
2. 호란의 배경
3. 정묘호란 과정
4. 병자호란 과정
5. 투쟁과 항복의 핵심인물 비교
(1) 최명길
(2) 김상헌
6. 척화파
7. 주화파
8.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나에게 임진왜란은 게임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 행주대첩 권율, 홍의장군 곽재우, 류성룡, 김시민등 여러 장수가 알려져 있고 많은 책들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병자호란 같은 경우는 광해군의 실리외교정책이후 일어난 인조반정이후에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없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시험만을 위한 공부에서 벗어나서 정말로 병자호란에 알고 싶었고 병자호란에 있었던 척화파와 주화파를 비교해가며 쓰기로 하였다.
2. 호란의 배경
광해군시기에 명은 본격적으로 부상한 후금의 심각한 군사위협에 직면했다. 명은 이 같은 상황을 맞아 임진왜란시기 자신들이 조선을 원조했던 공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조선을 압박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병력동참과 군수물자의 제공 등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아 기본의 대명관계를 유지하면 서 후금과의 무력 충돌을 적절히 회피하여 평화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중립외교정책은 당시의 정세에서 조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상황은 바뀌었다. 인조정권은 반정 직후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벅찼던 형편에 처해 있었다. 북인계의 인물들은 인조가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형편이었다. 명의 승인이 지연되자 명의 ‘승인’을 통해 새 정권 출범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자 했던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초조해졌고 이로 인하여 후금에게 노골적으로 화이론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모문룡 문제’였다. 인조반정을 ‘찬탈’이라 비난한 명 조정 여론을 때문에 모문룡의 협조가 필요했고 모문룡은 이 협조를 빌미로 해마다 10만 석 안팎의 군량을 공급해야 했고 명에게 끌려다녀야 했던 것이다.
3. 정묘호란 과정
후금의 정묘호란을 일으킨 원인은 조선의 ‘친명배금’정책보다는 ‘모문룡의 존재’와 후금 내부의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김용삼, 『조선 오백년 연사탐험』 , 동방미디어, 1996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가 한중관계』 , 푸른역사 , 2009
신병주,『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 2009
정약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 현실총서21, 2001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 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한국역사연구회 엮음,『한국역사입문 2 중세편』,풀빛,1995, 210쪽~ 211쪽.
심경호 , 지천 최명길의 문학과 사상에 관하여 . 고려대학교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