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허목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10.11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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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던 송시열과 허목에 관한 조사
목차
1. 시대적 배경
2. 인물 소개 - 송시열과 허목
3. 사건, 주장, 활동
4. 인식과 평가
5. 참고문헌 & 출저
본문내용
우리 역사상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송시열이다. 신돈이나 정도전, 혹은 정여립 같은 이들을 꼽기도 하지만 생전에나 죽은 후에 송시열에 집중되었던 논란의 비중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는 조선시대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러나 그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대(大)’자라는 접두사를 붙여, 대학자이자 대정치가라고 호칭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대(大)’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이유는 그의 학문이 그만큼 고명하고 그의 정치가 그만큼 고결했다는 뜻은 아니다. ‘대(大)’라는 접두사를 붙여야 할 만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영향에 대한 평가의 긍·부정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에게 ‘대(大)’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이유는 그 위상이나 역할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크기에 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과 역할이 컸고 치열했던 논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허목이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이 권력을 잡은 유학자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유교 근본주의적인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그 중심에 놓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의식이 있는 비주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참고 자료
조용헌 ‘척주동해비’
한영우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98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