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로초상」과「우암송시열초상」이었다. 「김재로초상」의 보고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관복의 모습이 진짜 관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리고 옆에 있는「우암송시열초상」은 조선시대 초상에서 잘 나타나는 전신이 잘 드러나 보였다. 조선 최고 성리학자가 내뿜는 기운을 느꼈다고나 할까?
이러한 논쟁은 주로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송시열을 잇는 노론학계의 산림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면서 우선은 그 학문적 입장에 따라 노론학계 내에 권상하(權尙夏) 계열과 ... 배우고 조성기의 문하에도 출입하는 등, 우암만을 스승으로 삼지는 않았던 까닭에 상대적을 우암의 적전으로 인정되기 어려웠다. ... 송시열 등 서인은 기년설, 윤휴 등 남인은 3년설.서인채택으로 확실한 주도세력이 됨. 2차(갑인)예송 : 말년에 효종비 죽자 대비 복제 대립.서인은 9개월대공설,남인은 기년설.
『우암선생 계녀서』는 송시열이 그의 맏딸을 권씨가로 시집보내면서 경계하여 쓴 글이며, 권씨 가문에 대대로 전하고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 여러 가지 계녀서 중 그 형성시기와 내용을 고려 할 때 다른 계녀서들의 모범이 되었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은 『우암선생 계녀서』이다. ... 『우암선생 계녀서』는 서사, 본사, 결사 그리고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사의 교훈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모를 섬기는 도리 2. 남편을 섬기는 도리 3.
양대 논쟁이 될 만큼 중요한 논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본론 (1) 논쟁의 발단 한국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관한 논쟁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서 우암 ...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수암 권상하(遂庵 權 尙夏, 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 心과 性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것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人性과 物性의 규정문제로 확대되었다. 18세기 초엽 조선조가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 율곡 계통의 학자 송시열의
이에 우암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계 학자들은 주자학적 소화관으로 대청북벌을 주장하였고, 뒤이어 대두된 북학론자들은 북벌론적 소화론을 강하게 비판하는 현실주의적 합리론을 주장하였다. ... 우암송시열은 명청복수론을 제기하며 의 대의명분론을 그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는 송제국의 북방정복왕조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표현으로서 존왕양이의 명분론적 화이사상을 명시하고 ... 조선후기 존아적 소화론과 동하의식 정통 주자학자인 송시열을 비롯한 북벌론자들의 소중화론은 후기 실학자와 양명학자들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는데, 17-18세기에 실학이 대두하여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송시열이 쓴 것이다. ... 송준길이 효종과 효종비가 돌아가신 후 두 번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송시열과 함께 정계에서 물러나 머물던 곳이다.
문집에 ≪규암집(圭庵集)≫이 있다. 5) 우암송시열 (尤庵 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