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한옥, 동춘당을 답사하다.
- 최초 등록일
- 2011.10.21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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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전에 있는 동춘 송준길가옥에 대한 자료보고서입니다.
제 선배들이 여기 가보려고 여러번 연락을 취했지만 항상 실패했었는데 저는 운좋게 말이 잘 되서 답사도 가보고 도면과 다른점과 느낀점을 많이 적을 수 있었습니다.
주관이 많습니다. 하지만 A+받았습니다. 요즘 교수님들이 원악많이들 배끼니까 주관적인 말들 좋아하시는거 알죠? 열공하시길
목차
1. 연구의 시작
2. 연구 내용
2.1 풍수지리
2.2 양택론
2.3 산림경제
2.4 학문적 성향이 건축에 끼친 영향
2.5 건물별 평면과 입면 위계와 동선에 대한 고찰
① 동춘당
② 대문 , 행랑채
③ 사랑채
④ 안채
⑤ 별묘와 가묘
본문내용
1. 연구의 시작
현재 대전 대덕구에 있고 동춘당이 위치한 송촌은 고려말 이래 은진 송씨의 600년 터전이다. 응봉산을 뒤로 하고 서쪽으로 넓게 퍼진 들판을 중심으로 주로 논과 밭이 많았던 지역이며 남북으로 자연촌락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송촌동이라 하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은진송씨 쌍청당 송유가 이 곳에 정착한 후, 대대로 은진송씨가 번성하여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아왔기 때문에 송촌이라 하게 되었다. 그 후 범위가 점차 넓어지자 아래송촌(중리동)과 윗송촌으로 나뉘어져 지금의 송촌동은 윗송촌이라 하고, 중리동 지역은 아래송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윗송촌을 크게 나누면 동춘당 송준길의 고택이 있는 마을이 송촌의 가장 중심이 된다하여 원송촌이고, 그 위쪽에 자리한 마을을 윗송촌(상송촌)이라 하였다.
본래 송촌동은 은진송씨가 입향하기 이전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김씨들이 집촌을 이루고 살아 김가쟁이 마을이라 하였다. 그후에는 백씨 등 각각의 성들이 살았고 만취촌이라 불렀으나 은진송씨가 들어오면서 송씨가 주를 이룬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일대의 땅들도 대부분 송씨들 소유로 되어 있었다. 당시 송촌동에 살던 사람들은 대체로 송씨네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같이 은진송씨들의 위세는 해방이후에도 계속되어 여전히 거대 지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송촌동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자 은진송씨들은 토지의 보상을 받고 타지로 이주하게 되었고 송씨의 집성촌 모습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동춘당(성리학자 송준길의 호이자 그의 고택의 별채건물 이름) 송준길은 한살 많은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쌍벽으로써 두 사람 모두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사계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우기 전에는 이곳 동춘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웃한 회덕향교에서 수학하였다. 사계에게서 글을 배우기 전에는 동춘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웃한 회덕향교에서 수학하였다. 사계선생은 율곡 이이로부터 글을 배웠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니 기호학파로서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춘당 송준길은 그의 스승 사계 김장생을 닮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나라의 전례나 모든 행사의 절차를 그에게 물어 시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답사
동춘당 보고서, 문화재청
그 외 여러 간행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