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의 한국통사
- 최초 등록일
- 2015.05.13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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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백암 박은식의 생애
2. 한국통사의 구성과 내용
3. 반식민주의 역사학의 발전
본문내용
1. 백암 박은식의 생애
박은식은 1859년(철종 10년)에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에서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성리학을 처음 접했고 화서 이항로 계통인 박문일과 박문오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그리하여 30세가 되는 때에는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의 대유학자인 돈암 선우협 이래의 서도 최대의 대유(大儒)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박은식 선생은 1896년을 전후하여 당시 주자학이 과연 당시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할 이론적 사상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의 성찰에 의하면 주자학은 군주와 재상과 양반관료의 학문이며 백성에게는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문이고, 당시 절실히 필요한 과학기술과 신식 제도와 병술을 전혀 등한시하는 학문이며 뿐만 아니라 주자의 해석을 글자 한 자만 고쳐도 사문난적으로 몰아치는 독단적인 학문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가 주자학에 대한 이러한 회의를 한 배경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저들을 읽어 실학적 전통을 일부 흡수한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은식은 서울에서 1896년부터 1898년에 걸쳐 전개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을 보고 마침내 주자학을 탈피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주자학자로서 위정척사파로 가지 않고 개화독립파로 대전환을 단행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그 해 9월 박은식은 남궁억, 유근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고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가장 시급한 과제가 국민에게 세계정세와 신지식을 가르치는 신교육의 보급이라고 보고 1900년부터는 한성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박은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박탈당하여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폐간을 당하게 되자 1904년 양기탁과 함께 베셀 베셀(1872-1909)은 영국 출신의 언론인으로서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04년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참고 자료
박은식 저, 김태웅 역해, 《한국통사》, 이카넷. 2012.
윤남한 외 역,《한국의 근대사상》, 삼성출판사, 1984.
김순석 저, 《박은식》, 역사공간, 2013.
한국역사연구회 편,《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89.
박은봉 지음,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