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훈구와 사림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8.11.26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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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중세사 조선에 대해 공부하고 정리한 레포트입니다.
다음과 같은 참고문헌을 하나로 정리하여 가다듬었습니다.
목차
1) 훈구, 사림의 등장
2) 조선전기의 정치적 문제와 그 해결
- 권력구조의 모순
-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
3) 사화의 발생과 사림의 대응
- 무오사화
- 갑자사화
- 기묘사화
- 을사사화
4) 사림의 성리학사상과 조선정치의 반영
- 조선 건국시 반영된 성리학적 사상
- 사림의 사상과 그 실현
본문내용
1) 훈구, 사림의 등장
고려후기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정치적 노선이 정몽주 중심의 온건개량파와 정도전 중심의 급진개혁파로 분화하였는데, 사림은 온건개량파, 훈구는 급진개혁파에 뿌리를 두었다.
이들 중 초기 훈구는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공로를 세우고 역대의 국왕을 보좌하여 조선의 문물제도의 정비에 주축으로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과거에 급제하고 중요한 사안에도 특별한 공로를 세워 공신에 책봉되었다. 정승, 6조 등의 고위관직에 자리해 있는 이들은 국정에 대해 포괄적이고 현실적인 집행을 담당하였으며 그 결과 원칙에 다소 벗어난 논리와 방법도 용인할 가능성이 컸다. 훈구의 사상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사림과 비슷하였으나, 현실의 사회 ․ 경제적인 기반이 달랐기 때문에 사림과 대조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사림이 수기(修己)를 위한 경학 공부를 중시했다면, 훈구는 과거 시험을 위한 사장학에 몰두함으로써 현실 정치에 밀착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했다.
훈구의 지배 하에 조선정치는 성종(1469~1494)시기에 지방의 유학자들이 대거 중앙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사림이라고 한다. 이들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로 이어지는 영남 출신의 유학자들에게서 학문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일찍이 새로운 왕조 개창에 반대하여 향촌의 중소 지주이자 지배층으로서의 자리하며 그 기반으로 삼았다. 향촌사회의 계급적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향소의 복립과 사창제ㆍ향사례ㆍ향음주례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실제로 사림이 중앙 집권에 장애가 되는 향촌자치적인 운영 방안을 적극 주장한 것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ㆍ경제적인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2) 조선전기의 정치적 문제와 그 해결
조선의 개국이라는 사회의 격변기에서 공신책봉으로 형성된 훈구는 새로운 정치 참여세력의 교체를 뜻하는 점에서 의미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개국공신의 경우 개혁정신이 분명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그들의 출신성분이나 경제적 조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의 안정기를 거친 후 형성된 세조와 성종초의 공신은 그 성격이 달랐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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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흠,「조선전기 훈구ㆍ사림의 갈등과 그 정치사상적 함의」『동방학지 124』, 2004.1
최이돈,「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쟁점』,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