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바티칸 공의회
- 최초 등록일
- 2022.05.24
- 최종 저작일
- 2014.11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 갈리아주의(교황권제한주의)
1-2.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프랑스 혁명
1-3.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 계몽주의
2. 본론
2. 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
2-2.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개과정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단
3. 결론
3-1.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
본문내용
17세기의 프랑스에서는 절대주의가 왕성하게 번창하였다. 이 절대주의는 국왕 루이 14세(1643~1715년)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었고, 추기경 리셸리외(Richelieu, 1585~1642년)와 마자랭(Mazarin, 1661년)에 의해 교회에 수용되었다. 이 절대주의는 교회와 종교는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의 중앙 집권제와는 달리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었다.
즉 프랑스의 국왕이 교황에 대한 지배를 결정한 아비뇽의 유배와 공의회 지상주의를 통해,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헌장을 반포하는 것을 프랑스가 거부함으로써 이미 준비되어 왔다. 갈리아주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교의 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갈리아주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교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볼 때 프랑스 교회의 자주성―로마로부터의 독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프랑스 교회의 자주성은 프랑스, 즉 갈리아 교회를 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교황 비오 2세는 1460년 공의회 지상주의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공의회 지상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절대주의의 진행은 프랑스의 국왕들로 하여금 교회에 부단한 요구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왕의 지상권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어떤 교구에서 공석이 되어 발생하는 성직록과 공석이 되어 있는 자리를 국왕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
국왕 루이 14세는 이것을 왕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1673년과 1675년 이 권리는 프랑스의 왕권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처음에는 침묵을 지켰다.
참고 자료
루돌프 피셔 불페르트, 교황사전(서울:가톨릭대학교 출판부,2001), 안영옥 역,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