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신채호의 생애와 역사인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신채호의 생애와 저서
Ⅲ. 신채호의 역사인식
1. 영웅론과 신국민
2. 한국사의 체계화
3. 직접 의열투쟁
Ⅳ.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조선역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사관으로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맞서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켜 나라를 되찾고자 한 인물로 유명하다. 비범한 머리와 뛰어난 학식, 날카로운 안목, 촌철 같은 문장력으로 시대를 잘 타고 났다면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을 그였지만 오천 년의 역사 중에 가장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학자의 길보다는 나라의 독립 쟁취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다가 그의 나이 57세라는 짧은 생으로 마감했다. 57년의 生 동안 그가 남긴 발자취는 실로 컸기에 57년이라는 생이 더 아쉽기만 하다.이에 단재의 생애와 저서를 알아보고 그가 활동한 시기를 세 시기로 나누어 역사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신채호의 생애와 저서
단재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에 아버지 신광식(申光植, 1849~1886)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당시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도림리,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며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18세손이다. 대전은 조부 신성우의 처가로 당시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재직 중에 1873년 부친상을 당하자 삼년상을 치르려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는데 큰 형 신약우가 삼년상을 주관하자 신성우는 대전의 처가에서 요청한 훈장 초빙을 받아들여 아들네를 데리고 대전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단재가 태어난 1880년, 여름에 신성우는 사헌부 장령을 다시 제수 받고 한양으로 가고 그해 겨울 12월에 단재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지 신광식이 병에 걸려 투병하게 되자 서둘러 고향 귀래리로 돌아오고, 조부 신성우 역시 1885년 서둘러 관직을 사임하고 귀래리로 돌아와 가족들을 돌보지만 이듬해 1886년에 아버지 신광식은 사망하였는데 단재 나이 7세 때이다. 조부 신성우는 귀래리로 내려와서도 서당을 열어 인근 주변의 아이들과 손자 재호와 채호를 가르치며 생활해 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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